‘호르무즈 해협 개방’은 미국과 이란이 합의한 휴전 조건의 핵심 사항이지만, 유조선들은 여전히 해협을 빠져나오지 못하는 숨 막히는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이란이 호르무즈 해협 개방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자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9일(현지시각) “이란은 수수료 부과를 당장 중단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반면 이란 최고 지도자 모즈타바 하메네이는 “새로운 방식으로 호르무즈 해협을 관리할 것”이라고 했다. 해운업계가 ‘불안한 휴전’ ‘기뢰 위험’ ‘통행료’라는 호르무즈 3중고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
9일 영국 BBC와 해양 데이터 서비스 업체 마린트래픽에 따르면 미국과 이란이 휴전에 합의한 지난 7일 이후 이틀간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한 선박은 유조선 3척, 컨테이너선 1척, 벌크선 7척 등 총 11척뿐이었다. 사실상 여전히 봉쇄 상태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전쟁이 시작되기 전엔 평균 138척의 선박이 이 해협을 통과했다. 현재 유조선 400척 이상, LPG 탱커 34척, LNG 선박 19척 등이 그대로 남은 상태다. 국제해사기구에 따르면 선원 약 2만명이 발이 묶여 있다.
게다가 휴전 이후 해협을 지나간 선박도 사실상 모두 이란이 소유하거나 실질적으로 운용하는 유조선과 화물선으로 분석됐다. 9일 팔라우·가봉 깃발을 단 유조선이 호르무즈 해협을 통행해 ‘휴전 이후 첫 비이란 선박 통행’으로 주목받았으나, 이들도 선적만 외국에 있을 뿐 사실상 이란 선박으로 나타났다.
한때 열렸던 해협이 이스라엘의 레바논 공격으로 다시 닫히며 유조선들이 통행을 포기하고 회항하고 있다는 소식도 있었다. 전 세계 원유 해상 수송량의 약 20%가 지나는 해협이 막히면서 국제 유가 등 에너지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호르무즈 해협이 여전히 굳게 닫히면서 이날 브렌트유는 1.23%, 미 서부 텍사스산 원유는 3.66% 올랐다.
국제 사회에서는 휴전 합의 이후에도 안전이 담보되지 않는 현실을 마주하고 있다. 이란은 미국과 상호 공격을 중단하면서도 지금까지 해협을 열겠다고 명시적으로 밝힌 적이 없다. 이런 상황에서 섣불리 통행에 나섰다가 강경파인 혁명수비대의 공격을 받을 수 있다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다. CNN은 “어떤 선박이 언제 통과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지침이 없는 상황에서 선사들은 통행을 주저하고 있다”고 했다. 현지에서는 이란의 동맹인 중국계 유조선과 선박들이 먼저 이 해협을 통과하는 상황을 지켜본 뒤 다른 국적 선사들도 움직일 것이라는 예상이 나온다.
이란이 해협에 해저 기뢰를 설치해놨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최근 이란이 승인한 선박은 평상시에 주로 사용되던 항로가 아닌 이란 측 연안에 가까운 곳을 따랐다. 기존 항로에 기뢰가 설치됐을 수 있다는 의미다. 거액의 통행료도 현실화할 수 있다. 해운 시장 전문 컨설팅 업체 베스푸치 마리타임의 설립자 라르스 옌센은 BBC에 “이란은 해협을 통과하려면 통행료를 내야 한다는 입장이고 선사들은 주저한다”고 했다. 이란은 암호화폐나 중국 위안화로 통행료를 받을 예정이며 대형 유조선의 경우 최대 200만달러(약 30억원)에 이를 수 있다.
호르무즈 해협을 둘러싼 미국과 이란의 기싸움도 이어지고 있다. 이란 모즈타바 하메네이는 부친인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 사망 40일째를 맞아 밝힌 공개 메시지에서 호르무즈 통제를 공식화하면서 “그들(미국·이스라엘)이 저지른 행위에 대한 책임을 끝까지 물을 것”이라고 했다. 구체적인 내용을 밝히지 않았지만, 고액의 통행료 부과 등을 가리킨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 대통령은 통행료 문제에 대해서 엇갈린 메시지를 내놨다. 그는 8일에는 미국이 이란과 통행료를 걷어 나눠갖는 ‘합작사업(joint venture)’ 구상을 밝혔지만, ‘항행의 자유’ 원칙 훼손과 국제법 위반 논란이 일자 9일에는 “이란이 수수료를 부과하고 있다는 보도가 있는데 당장 중단해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