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티 비롤 국제에너지기구(IEA) 사무총장이 지난해 4월 24일 영국 런던에서 열린 미래 에너지 안보 국제 정상회의에서 개회사를 하고 있다. 비롤 사무총장은 7일 본지 인터뷰에서 최근 미국·이란 전쟁으로 주요 에너지 시설이 파괴된 데 대해 “1970년대 오일쇼크, 코로나 팬데믹, 우크라이나 전쟁을 모두 합친 것보다 더 심각한 에너지 공급 위기”라고 했다. /AFP 연합뉴스

파티 비롤(Fatih Birol) 국제에너지기구(IEA) 사무총장은 7일(현지 시각) 미국·이란 전쟁에 대해 “1970년대 오일 쇼크, 코로나 팬데믹, 우크라이나 전쟁을 모두 합친 것보다 심각한 세계사적 위기”라며 “당장 오늘 전쟁이 종결된다 해도 세계는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으며, 에너지 공급망을 정상화하는 데는 향후 막대한 시간과 비용이 들어갈 것”이라고 했다. 이날 프랑스 파리의 IEA 본부에서 본지를 만난 비롤 사무총장은 “한국은 원자력과 신재생 에너지로 화석 연료 의존성에서 탈피하고 전기 에너지를 활성화해야만 생존 가능하다”고 했다.

IEA는 1974년 1차 석유 파동 직후 에너지 위기에 대응하고자 설립된 국제 기구다. 튀르키예 출신 에너지 경제학자인 비롤 사무총장은 2015년부터 IEA 수장을 맡고 있다.

―미국·이스라엘이 이란 에너지 시설을 공격하고 이란도 중동국 인프라에 보복을 가했다.

“IEA 데이터에 따르면 중동 전역의 중요 에너지 시설 73곳이 피해를 입었다. 그중 3분의 1 이상은 매우 심각한 수준이다. 석유, 가스, 석유화학 제품 등 모든 것을 통틀어 이토록 거대한 공급 위기를 본 적이 없다.”

―역사적으로 볼 때 얼마나 나쁜 상황인가?

“1973년·1979년 두 차례의 오일 쇼크, 2019년 코로나 팬데믹, 2022년 우크라이나 전쟁을 모두 합친 것보다 더욱 심각하다. 석유·가스 공급 마비는 말할 것도 없고, 식량 가격과 직결되는 비료·석유화학 제품, 헬륨 등 다른 필수 원자재 유통망까지 굳어버렸다.”

―미국·이란이 2주간 휴전하기로 했다.

“당장 오늘 종전이 돼 호르무즈 해협의 석유와 가스 유통이 재개된다 하더라도, 전쟁으로 파괴된 시설을 복구해 재가동하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재정 여력이 있어 상대적으로 덜 어렵겠지만 이라크는 훨씬 심각하다. 이라크는 석유를 비축할 저장 시설이 파괴돼 어쩔 수 없이 유전을 폐쇄한 상태인데, 이라크는 사우디 같은 재정 여건이 되지 않는다는 게 문제다.”

3월 2일 이란의 드론 공격을 받아 파괴된 사우디아라비아 라스 타누라 정유소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IEA는 어떤 조치를 취했나?

“지난달 11일 4억배럴 규모 비축유 방출을 발표해 국제 유가가 20달러 하락했다. 우리 정책을 강력히 지지해 준 한국 정부에 감사한다. 이번 방출은 전체 비축량의 20%에 불과했고 아직 80% 여력이 있다. 또 사우디아라비아, 브라질, 한국, 일본 등 각국 정부와 논의하며 호르무즈 사태 대응을 위한 국제적 공조를 이끌어냈다. 이어 자동차 제한 속도를 낮추고, 주 1회 재택근무를 하며, 대중교통을 무료화하거나 가격을 내리라는 정책을 각국 정부에 제안했다.”

―트럼프 미 대통령은 “우리는 호르무즈 석유가 필요 없다. 미국엔 석유가 많다”고 했다.

“세계 유가는 하나다. 유가가 오르면 모든 국가, 모든 사람이 영향을 받는다. 각자 받는 타격의 강도가 다를 뿐이다. 단언컨대 그 어떤 국가도 이 위기에 완전한 면역을 갖추고 있다고 볼 수 없다.”

―어느 나라가 가장 큰 타격을 입었나?

“주요 석유·가스 수입국이자 재정 여력이 없는 아시아의 개발도상국들이다.”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같은 개도국 경제가 가장 큰 상처를 입었음을 나중에 알게 될 것이다. 이들 국가의 정치적 불안정도 우려된다. 물론 한국과 일본도 큰 도전에 직면했다.

―이번 사태의 교훈은.

“에너지 시스템의 황금률은 바로 다각화(Diversification)다. 단일 국가나 경로에 너무 의존해서는 안 된다. 또 자국 내에서 에너지를 최대한 생산해야 한다.”

―한국 역시 큰 피해를 본 나라다.

“한국 에너지의 미래는 전기에 있다. 가능하면 모든 것을 전동화(Electrify)하라는 조언을 하고 싶다. 재생에너지와 원전 가동을 늘려야 한다. 특히 교통 부문에서 전기차를 활성화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한국 정부의 고리 원전 2호기 재가동 결정은 아주 훌륭했다.”

―원자력은 이번 부셰르 원전 공격 사태에서 보듯 위험도 상존한다.

“원전이든 태양광 발전소든 유사시 공격 대상이 될 수는 있다. 나는 한국을 여러 번 방문해 ”원자력은 매우 중요하며 이를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원전뿐 아니라 풍력, 태양광 등 재생에너지 생산을 병행하고, 이를 효율적으로 전력 공급망에 통합시키려면 아주 강력한 전력망(grid)이 필수적이다.”

―세계가 이번 위기를 화석 연료에서 탈피하는 기회로 삼을 수 있을까.

3월 23일 호주 캔버라의 내셔널 프레스 클럽에서 연설하는 국제에너지기구(IEA)의 파티흐 비롤 사무총장. /AP 연합뉴스

“재생에너지는 이제 ‘에너지 안보’라는 명분으로 큰 추진력을 얻게 될 것이다. 유럽은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재생에너지 설치를 300%나 늘렸다. 1970년대와 마찬가지로 많은 국가가 원전을 도입할 것이다. 전기차 전환도 빨라질 것이다. 다만 일부 국가에선 석탄이 반사 이익을 얻을 수 있다.”

―우리가 이 전쟁 이전의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미래에도 사람들은 항상 이 사태를 기억하며 완전히 다른 무역 파트너, 다른 기술, 다른 해결책을 찾으려 할 것이다. 우리는 모든 것이 예전 같았던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갈 수 없다. 유리는 이미 깨졌고, 다시 예전처럼 붙여 놓을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