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원래 들어가야 하는 비용보다 수억 달러 더 많은 돈을 들여 건물을 지었기 때문에 수사를 받고 있다.” 18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워싱턴 DC 백악관에서 기자들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미국의 중앙은행 연방준비제도(연준)를 이끄는 제롬 파월 의장이 전날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에서 기준금리 동결이 결정된 뒤 기자회견에서 “(나에 대한) 검찰 수사가 투명하게 그리고 완전히 마무리될 때까지 이사직을 떠날 의사가 전혀 없다”고 말한 데 대한 반응이었다.
‘숫자’에 관심이 집중되기 마련인 FOMC 후 기자회견에서 연준 의장이 개인 신상에 발언하는 것도, 대통령이 그를 겨냥해 수사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것도 전례 없는 일이다. 세계에서 가장 힘 센 나라의 대통령과 세계 경제를 좌우하는 경제 대통령이 정면 충돌 양상으로 치달으면서 “치킨 게임 상황으로 비화했다(폴리티코)”는 분석까지 나온다.
파월은 트럼프가 1기 임기 첫해였던 2017년 11월 연준 의장으로 지명한 인물이다. 트럼프는 “미국 경제가 직면한 여러 도전을 극복할 지혜와 지도력을 갖춘 인물”이라며 파월을 치켜세웠으나 이듬해 2월 파월 취임 뒤 두 사람의 관계는 빠르게 냉각됐다. 트럼프는 집권 뒤 줄곧 경기 부양을 위해 연준이 금리를 과감하게 내려야 한다고 공개 발언했다. 그러나 파월은 “인플레이션에 선제 대응해야 한다”며 선을 그었다. 파월의 취임 첫해 연준은 네 차례에 걸쳐 기준 금리를 총 1%포인트 올렸다.
연준은 이후 코로나 창궐기 금리를 제로 금리 수준으로 내리기도 했지만, 트럼프와 파월 관계는 이미 틀어진 뒤였다. 파월은 후임 민주당 조 바이든 대통령 임기였던 2022년 민주·공화 양당의 초당적 지지로 무난히 연임에 성공했다. 파월의 승승장구를 바라보며 백악관 재입성을 목표로 하던 야인(野人) 트럼프는 2024년 대선 후보 지위를 굳히면서 공공연하게 “파월은 민주당을 돕고 있다. 2기 임기를 시작하면 재지명하지 않겠다”고 했다.
트럼프는 실제로 2025년 1월 재집권 뒤 여러 차례 공식 석상에서 파월에 대해 “바보” “무능한 사람” “해임하고 싶다” 등의 말을 써가며 깎아내렸다. 트럼프의 ‘파월 축출 구상’은 지난해 6월부터 본격화했다. 당시 상원 청문회에서 청사 리모델링 비용이 예상보다 많이 나온 이유에 대한 파월의 답변이 명쾌하지 않다며 트럼프 진영에서 위증 의혹을 제기했다. 이는 공사 관리·감독 총책임자인 파월에 대한 문책론으로 이어졌다.
트럼프는 기다렸다는 듯 지난해 7월 현직 대통령으로서 이례적으로 연준을 방문해 안전모를 쓴 채로 파월에게 인상된 공사비에 대해 조목조목 따졌다. 하지만 파월은 주눅 들지 않고 맞받았고, 두 사람은 갈등의 원인이 된 금리 문제를 놓고 설전을 벌였다. 그리고 지난 1월 연방 검찰이 파월에 대해 대배심 소환장을 보내며 위증 혐의로 수사에 착수했다. 이에 파월은 즉각 동영상 성명을 통해 수사 사실을 알리고 “연준이 정치적 압박에 휘둘리는지가 이 문제의 핵심”이라고 했다. 트럼프가 검찰을 동원해 자신을 정치적으로 손보려 한다는 대국민 메시지를 보낸 것이다.
과거에도 대통령과 연준 의장 간 갈등이 불거진 사례가 없지 않다. 1970년대 초반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당시 아서 번스 연준 의장에게 금리를 내리도록 지속적으로 압박했다는 사실이 훗날 번스의 일기 등을 통해 밝혀졌다. 1990년대 초반 조지 H W 부시 대통령도 자신의 금리 인하 요구에 대해 “인플레이션이 우려된다”며 신중한 금리 정책을 고수한 앨런 그린스펀 연준 의장과 갈등했다. 그러나 트럼프와 파월의 사례처럼 검찰 수사까지 불러오며 불구대천 사이가 된 경우는 없다.
트럼프는 지난 1월 새 연준 의장 후보로 케빈 워시 전 연준 이사를 지명했고, 파월의 임기는 5월까지다. 그러나 파월이 전날 의장직에서 물러나도 연준 이사직은 유지하겠다는 방침을 밝히면서 둘의 싸움은 장기전으로 갈 공산이 커졌다. 일반적으로 의장을 그만둘 때 이사직에서도 물러나지만, 반드시 따라야 한다는 규정은 없다. 파월의 연준 이사 임기는 2028년 1월 31일까지다.
현재 국면은 파월에게 일단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다. 우선 검찰 수사가 초반부터 삐끗하고 있다. 지난주 제임스 보즈버그 워싱턴 DC 연방법원 판사는 “소환장의 주된 목적이 파월을 괴롭히고 압박해 대통령에게 굴복하게 하거나 사임토록 해 그 자리에 대통령의 뜻을 따를 인사를 연준 의장직에 앉히려는 것”이라면서 대배심 소환장의 효력을 정지했다. 이에 대해 연방 검찰은 항소하겠다는 뜻을 밝혔지만 초동 수사 동력이 상실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집권 공화당 내 기류도 트럼프에게 우호적이지 않다. 케빈 워시 새 연준 의장 지명자 인사 청문회를 맡게 될 연방 상원 은행위원장 톰 틸리스 의원은 “연준의 정치적 독립성을 위해 수사가 끝날 때까지 인준 청문회를 보이콧한다”고 밝혔다. 리사 머코우스키 의원도 검찰의 파월 수사 비판 성명을 내며 트럼프를 저격했다.
트럼프와 파월의 싸움의 향방에 따라 주요 경제 정책도 영향을 받을 전망이다. 금리 결정 회의에는 연준 이사 7명(의장 포함)과 연방준비은행 총재 5명(뉴욕 연은 총재는 고정) 등 총 12명이 참여한다. 현재 연준 이사 중 3명이 친트럼프계다. 파월이 이사직에서 물러나 트럼프가 새 이사를 임명하면 이사회 과반이 트럼프계로 채워진다. 반면 파월이 이사직을 고수하면 현재 구도가 2028년 1월까지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