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 쿠제치 주한 이란대사는 5일 서울 용산구 주한 이란대사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란의 역내 군사 대응이 미국·이스라엘의 선제 공격에 따른 정당방위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침략이 완전히 중단돼야만 협상 테이블에 앉을 수 있고, 한국도 이번 사태에 대해 분명한 입장을 내야 한다고 말했다.

사이드 쿠제치 주한 이란대사가 5일 오전 서울 용산구 주한 이란이슬람공화국대사관에서 열린 이스라엘과 미국의 대이란 군사적 공격과 관련해 공식 입장을 밝히고 있다. /박성원 기자

쿠제치 대사는 “지난달 28일 새벽 이스라엘 정권이 트럼프 행정부와 공조해 이란 영토를 침략했다”며 “이란은 유엔 헌장 제51조에 보장된 자위권을 행사하는 데 주저함이 없다”고 말했다. 이번 공습으로 남부 호르모즈간주 미나브 소재 여자초등학교 학생 165명이 숨졌다며 이를 ‘전쟁범죄’로 규정했다.

핵 협상 경위에 대해서는 “지난 9개월간 이란은 핵 문제를 놓고 미국과 두 차례 협상을 진행했고, 오스트리아 빈에서 세 번째 회의를 열기로 합의한 상태였다”며 “작년 6월 미국·이스라엘에게 공격을 받고도 이란은 마지막 순간까지 외교와 대화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지만, 미국과 이스라엘은 이를 저버렸다”고 주장했다. 협상 재개 가능성에 대해서는 “전면적인 공격이 이뤄지고 있는 상황에서 협상 테이블에 앉을 수 없다”고 선을 그었다.

사이드 쿠제치 주한 이란대사가 5일 오전 서울 용산구 주한 이란이슬람공화국대사관에서 열린 이스라엘과 미국의 대이란 군사적 공격과 관련해 공식 입장을 밝히기에 앞서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있다. /박성원 기자

미국 측 협상 대표인 스티브 윗코프 중동특사를 겨냥한 발언도 나왔다. 쿠제치 대사는 “트럼프는 핵 협상을 부동산 계약처럼 여기는 것 같다”며 “부동산 업무를 하는 사람을 핵 협상 자리에 앉힐 수 없다”고 했다. 이어 “트럼프 대통령은 JCPOA를 한 번도 읽어보지 않았을 것”이라고도 주장했다. JCPOA는 2015년 오바마 행정부 시절 체결된 이란 핵 합의로, 트럼프 대통령이 1기 재임 중이던 2019년 미국의 탈퇴를 결정하면서 사실상 붕괴됐다.

핵무기 개발 의혹에 대해서는 나치 독일 선전장관 괴벨스의 발언을 인용해 “거짓말도 반복하면 믿게 된다는 식의 선동에 불과하다”고 했다. 그는 “IAEA(국제원자력기구)가 15차례에 걸쳐 이란의 핵 활동이 군사적 목적과 무관하다고 확인했다”며 “핵무기를 보유한 것은 이스라엘이고, 이스라엘은 IAEA 사찰조차 거부하고 있다”고 했다. 미국·이스라엘을 국제형사재판소(ICC)에 제소할 의향이 있느냐는 질문에는 “자료를 확보해 제소할 의향이 있다”고 답했다.

쿠제치 대사는 알리 하메네이 최고지도자의 사망에 대해 “피신할 수 있는 시설이 있었음에도 이를 사용하지 않고 집무 공간을 지키다 순교했다”며 “언제나 국민과 함께 있어야 한다는 신념이 있었던 지도자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후계 선출 절차에 대해서는 “헌법에 따라 모든 것이 진행 중”이라면서도 “최고지도자 선출은 전문가 회의를 거쳐야 하는데 현재 전시 상황이어서 아직 선출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차남 모즈타바 하메네이가 유력 후계자로 거론되는 데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았다.

5일 오전 사이드 쿠제치 주한 이란 대사의 기자회견을 앞둔 서울 용산구 주한 이란 대사관에 미군과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사망한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의 초상이 걸려 있다. /박성원 기자

쿠제치 대사는 한국 정부에 보다 적극적인 역할을 촉구했다. 앞서 한국 외교부는 지난 2일 대변인 성명을 통해 “북한 핵문제의 당사국으로서 국제 비확산 체제 수호에 확고한 의지를 갖고 이란 핵문제 해결을 위한 국제사회의 노력에 동참해왔다”고 밝힌 바 있다. 이에 대해 쿠제치 대사는 “충분하지 않다”며 “경제·비즈니스 선진국인 한국이 분쟁 방지를 위해 보다 분명한 입장을 표명해줬으면 한다”고 했다.

다만 미국·이스라엘을 공개 비판했다가 트럼프 대통령의 강한 반발을 받은 페드로 산체스 스페인 총리 사례를 언급하며 “트럼프가 다른 나라들에 스페인처럼 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보내는 것 아닌가 싶다”고 덧붙였다. 북한이 미국·이스라엘을 규탄하는 성명을 낸 데 대해서는 “국제 규범을 지키기 위한 규탄이라고 생각한다”며 감사를 표했다.

주한미군 전력의 중동 재배치 가능성에 대해서는 “미군은 어떤 나라에 기지를 만든 뒤에는 그 기지를 미국 땅처럼 여긴다”며 “한국의 무기나 미군을 중동에 배치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호르무즈 해협 봉쇄 여부에 대해서는 “공식 봉쇄 발표는 없다”면서 “선박 통행이 줄어든 것은 보험회사나 선주들의 자체 판단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걸프 지역 민간 시설 피해 보도에 대해서는 “모사드와 CIA의 공작”이라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