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핵탄두 보유량을 늘리겠다”며 “위험하고 불안정한 세상에서 자유로우려면 두려움의 대상이 돼야 한다”고 했다. 프랑스의 핵전력 증강은 냉전 종식 이후 30여 년 만에 처음이다. 프랑스 등 유럽은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 차원에서 미국 핵우산의 보호를 받고 있다. 그러나 지난해 미 도널드 트럼프 2기 출범 이후 유럽과 미국의 ‘대서양 동맹’이 흔들리자, 유럽 자체 핵우산을 프랑스 중심으로 펼치겠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지난해 영국과 핵 공유 협정을 체결했던 프랑스는 2차 대전 패전국 독일과도 핵 공유 논의를 본격화할 방침이다. 프리드리히 메르츠 독일 총리는 마크롱과 공동 성명에서 “고위급 핵 운영 그룹을 만들겠다”고 밝혔다.
◇유럽 안보의 맹주 노리는 프랑스
마크롱은 2일 르테메레르 원자력 잠수함이 배치된 일롱그섬 해군 기지에서 “우리 억지력이 확실한 파괴력을 유지하도록 보장하는 게 내 책임”이라며 “핵탄두 숫자를 늘리기로 결정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중국의 군사력 증강, 미국의 안보 우선순위 변경 등을 배경으로 제시했다.
현재 프랑스는 핵탄두 약 290기를 갖고 있다. 러시아·미국·중국에 이어 세계 네 번째 규모지만 유럽 전체를 방어하기엔 한참 모자란 전력이다. 마크롱은 “유럽 대륙 차원의 억제 전략을 구상하겠다”며 유럽 위기 시 프랑스 본토의 핵 전력을 동맹국으로 전개하겠다고 했다. 프랑스가 유럽 안보의 맹주가 되겠다는 구상으로 해석됐다.
프랑스는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 이후 EU 내 유일한 핵 보유국이다. 마크롱은 프랑스 중심 핵우산에 영국·독일·폴란드·네덜란드·벨기에·그리스·스웨덴·덴마크가 동참한다고 밝혔다. 이들 국가 영공에서 핵무기를 탑재한 프랑스 공군기가 훈련하거나, 해당 국가 기지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 등이 담긴 관련 협정 논의도 시작했다.
현재 독일·벨기에·네덜란드·이탈리아·튀르키예 등 나토 일부 회원국에 미국 핵무기가 배치돼 있다. 그러나 트럼프 행정부가 유럽 안보에서 발을 빼는 듯한 움직임을 보이자 프랑스 등 각국에선 ‘미국을 믿을 수 없다’는 우려가 지속적으로 제기됐다. EU는 최근 8000억유로(약 1258조원) 규모의 ‘유럽 재무장 계획’을 확정했다. 각 회원국 역시 천문학적 국방 예산을 편성해 미국 무기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핵심 파트너는 독일, 올해 협력 시작”
마크롱은 “독일이 핵심 파트너”라며 전략 시설 방문과 합동 훈련 등 협력의 첫 단계가 올해 시작될 것이라고 말했다. 독일은 1990년 통일 당시 미국·영국·프랑스·소련과 맺은 협정으로 핵무기 개발이 원천 차단됐다. 마크롱과 메르츠는 이날 공동 성명에서 “교리적 대화와 전략적 협력을 조율하기 위한 고위급 핵 운영 그룹을 만들었다”며 핵확산금지조약(NPT)을 비롯한 국제법 의무를 지키겠다고 밝혔다.
이들은 양국 협력에 대해 “핵 억지력이 여전히 유럽 안보의 주춧돌이라는 공통 인식에 기반한다”며 “나토의 핵 억지력과 핵 공유 체계를 대체하지 않고 보강할 것”이라고 말했다. 프랑스와 독일은 지난달 뮌헨안보회의에서 핵우산 논의를 공식화하기도 했다.
다른 유럽 국가들도 적극 협력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메테 프레데릭센 덴마크 총리는 “더 강력한 협력은 유럽의 억지력 강화에 기여할 것”이라며 “앞으로 몇 년간 러시아의 군사적 위협이 커질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에 필요한 일”이라고 했다. 자체 핵무장을 주장해 온 도날트 투스크 폴란드 총리도 “적들이 감히 우리를 공격하지 못하도록 동맹국들과 함께 무장하고 있다”고 했다.
미국과 러시아의 핵 군축 협정인 신전략무기감축조약(New START·뉴스타트)이 지난달 종료된 가운데 마크롱의 선언이 핵 보유국들의 군비 경쟁을 부추길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핵무기폐기국제운동(ICAN) 프랑스사무소장 장마리 콜랭은 “핵 보유국이 핵 군축을 추진하도록 한 핵확산금지조약의 정신에 어긋난다”며 “러시아가 중대한 도발로 간주해 긴장이 고조될 위험이 있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