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억만장자 제프리 엡스타인의 성 착취 범죄에 동조한 의혹으로 영국 왕자 직위를 박탈당하고 왕실에서도 쫓겨났던 앤드루 마운트배튼-윈저(66)가 경찰에 체포돼 사법 처리 가능성까지 대두되자 영국 왕실이 긴장하고 있다.
앤드루의 친형인 찰스 3세 국왕이 앞장서 엄정한 수사·처벌 의지를 밝혔지만 한동안 잠잠해졌던 군주제 폐지론을 되살리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앞서 지난 19일 영국 경찰은 앤드루를 공직 비위 혐의로 체포한 뒤 같은 날 저녁 석방했다. 앤드루가 체포된 날은 그의 생일이었다고 영국 언론들은 전했다.
경찰은 이날 오전 8시쯤 그를 체포한 뒤 “노퍽주(州)에 사는 한 60대 남성을 공직 비위 혐의로 체포해 버크셔와 노퍽의 거주지를 수색 중”이라고 발표했다. 경찰은 “국가 지침에 따라 체포된 남성의 이름은 공개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거주지에 출동한 경찰차, 호송차에 탑승한 앤드루의 모습 등 현장 사진이 쏟아져 나왔다. ‘공직 비위’는 공직 권한이나 책임을 고의적으로 심각하게 남용하거나 게을리 수행하는 범죄다. 유죄 확정 시 최대 종신형까지 받을 수 있다. 영국에서 왕실 구성원이 체포된 것은 1649년 찰스 1세 국왕이 올리버 크롬웰에 의해 폐위·처형된 뒤 377년 만이다.
앞서 경찰은 앤드루가 엡스타인이 인신매매한 여성과 성관계를 맺고, 미국 주재 영국 무역 특사로 재직하던 2010년 엡스타인에게 기밀 정보를 유출했다는 의혹을 수사 중이라고 밝힌 바 있다. 미성년 시절 그에게 성폭행을 당했다는 여성들의 폭로도 이어졌다.
앤드루는 모든 혐의를 부인했지만 여론이 걷잡을 수 없이 악화하자 왕실은 ‘손절’을 택했다. 2011년 무역 특사 직에서 내려왔고, 미성년자 성폭행 관련 재판이 시작된 지난 2022년에는 왕립 군대에서 갖고 있던 직함과 ‘전하(His Royal Highness)’ 호칭을 박탈당했다. 지난 10월에는 왕자 칭호마저 박탈당하고 왕실 영지 퇴거를 명령받았다.
찰스 3세는 이날 동생의 체포 사실이 알려진 뒤 낸 입장문에서 “깊은 우려를 표한다”면서도 “법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고 했다. 필요할 경우 경찰에 적극적으로 지원하겠다는 의사를 내비쳤다. 찰스 3세는 입장문에서 앤드루를 ‘앤드루 마운트배튼-윈저’라고 언급하고 형제 또는 전(前) 왕자라는 점을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이번 경찰의 체포 작전은 왕실에 사전 통지 없이 진행됐다.
이번 체포는 군주제 폐지론에 시달렸던 영국 왕실에 상당한 악재가 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왕실 전문가 알라스테어 브루스는 일간 가디언에 “영국 왕실에 있어 가장 충격적인 날이고, 왕실이 직면할 수 있는 가장 심각한 위기”라고 말했다. 또 다른 왕실 전문가 산드로 모네티는 CNN에 “전통적으로 왕실 구성원의 생일에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종이 울렸지만 오늘날 울린 것은 왕실에 대한 경종일 뿐”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