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에 참석한 제시 잭슨 목사/AP 연합뉴스

미국 민권운동의 대부 제시 잭슨 목사가 지난 17일(현지 시각) 시카고 자택에서 84세로 별세했다. 유족들은 성명을 통해 잭슨 목사가 “평화롭게 세상을 떠났다”며 “우리 가족뿐 아니라 전 세계의 억압받는 사람들,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는 지도자였다, 그가 실천한 가치를 위해 투쟁하는 것으로 그를 기려 달라”고 했다. 잭슨 목사는 작년 11월 난치성 신경 질환인 진행성 핵상마비(PSP) 치료를 위해 입원한 바 있다.

잭슨 목사는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정신을 이어받아 소외 계층 권익 향상에 앞장 선 인물이다. ‘아프리카계 미국인(African American)’이라는 용어를 정착시켰고,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흑인 지도자로 꼽혔다.

뉴욕타임스 등에 따르면 잭슨 목사는 인종차별이 만연했던 미국 남부 사우스캐롤라이나주 빈민가에서 미혼모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 “인종에 따른 계급 차이를 뼈저리게 배웠다”고 했다. 당시 미국 남부에서는 ‘짐 크로우 법’을 적용해 학교·식당·버스 등에서 백인과 흑인을 철저히 분리했다. 미식축구를 통해 미 북부 한 대학에 진학했을 때도 차별은 여전했다. 그는 “남부에서는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가장 모욕적인 인종차별적 욕설을 북부의 대학생들에게서 들었다”고 했다. 그는 미식축구를 포기하고 목사의 길을 택했다.

1968년 마틴 루터 킹 목사(오른쪽에서 두번째)와 함께 웃고 있는 제시 잭슨 목사(왼쪽에서 두번째)의 모습/연합뉴스

1964년 시카고 신학대학원에 입학한 잭슨 목사는 앨러배마주 셀마에서 흑인 시위대가 구타당하는 모습에 신학교 학생들, 교수들을 이끌고 남부로 향한다. 이때 흑인 인권운동의 대부이자 잭슨 목사의 스승인 마틴 루터 킹 목사와 처음 만난다. 당시 모텔 주차장에서 2층 발코니에 있던 킹 목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총에 맞았다고 묘사했다. 잭슨 목사는 킹 목사의 피가 묻은 스웨터를 입고 아침 방송에 출연해 애도하는 등 킹 목사의 정신을 이어 민권운동을 전개했다.

잭슨 목사는 다른 민권운동가들과 달리 제도를 이용한 구조적인 방법으로 차별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불매운동을 통해 백인 기업들이 흑인 노동자를 고용하게 하거나 흑인 계약업체에서 상품과 서비스를 구매하도록 압력을 가하는 ‘흑인 자본주의’ 등으로 백인 기득권을 압박했다.

민주당 주요 정치인들과 가까이 지내며 흑인 민권운동가들이 민주당에 입당해 정치 활동을 하도록 장려했다. 덕분에 존 루이스나 앤드루 영 같은 주요 흑인 민권운동가들이 1970년대 말 민주당에 입당해 의원이나 주지사 등으로 당선됐다. 민주당에서 원내 흑인 코커스(Congressional Black Caucus)가 설립됐고, 잭슨 목사의 영향을 받은 흑인 정치인들이 어렵지 않게 민주당 고위직에 오르기도 했다.

1984년 5월 미국 LA의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아내 재클린을 안고 웃고 있는 잭슨 목사./연합뉴스

1984년과 1988년 대선 땐 직접 민주당 예비선거에 출마했다. 1988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는 “희망을 잃지 마십시오(Keep hope alive)”라는 구호로 유권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 구호는 여러 선거운동에서 활용됐고, 2008년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 당선 때도 울려 퍼졌다. 오바마 전 대통령은 소셜미디어를 통해 “미셸과 나는 그분의 업적으로 성장해왔다, 잭슨 목사의 두 번의 역사적인 대선 출마는 제가 미국 최고위직에 오르기 위한 토대가 됐다”며 “그는 60년이 넘게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변화 운동을 이끌었으며, 여러 세대의 아프리카계 미국인에게 기회를 만들어주었다”고 했다. 클레이본 카슨 스탠퍼드 대학교 역사학과 교수도 “(잭슨 목사가) 1960년대 흑인 투표권 획득을 정치적 현실로 구현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그 덕분에 흑인 대통령이 탄생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잭슨 목사의 영향으로 미국 내 흑인 인권은 가파르게 성장했다. 흑인 중산층이 늘어났고, 이전의 폭력 노선과 다른 잭슨 목사의 문화적, 비폭력적 투쟁은 흑인 민권운동을 제도권에 안착시키는 데 성공했다.

선거에서 낙선한 뒤 잭슨 목사는 세계를 다니며 민간 순방 외교를 폈다. 마약 문제로 쿠바에 억류된 미국인 22명과 정치 포로 27명을 구했고, 코소보 전쟁에서 붙잡힌 미군들의 석방을 도왔다. 걸프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는 이라크와 쿠웨이트에서 인질들을 구해냈다.

2016년 7월 제시 잭슨 목사(맨 앞줄 왼쪽에서 두번째)가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버락 오바마 당시 후보의 이름이 적힌 손피켓을 들고 있다./연합뉴스

1986년 방한 땐 비무장지대(DMZ)를 둘러보고, 가택연금 상태였던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을 만났다. 북한에 억류된 미국인 석방 등을 위해 일했고, 2018년 남북 정상회담 때는 “북한은 이제 두려움의 대상이 아닌 대화의 상대”라고 환영했다.

사생활 논란도 있었다. 2001년 그가 자신의 시민단체에서 일했던 여성과 사이에서 딸을 낳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아들인 제시 잭슨 주니어가 선거 자금 75만달러를 개인적인 용도로 사용해 30개월 징역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잭슨 목사 별세 소식에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의 소셜 미디어에 그와 함께 촬영한 사진을 올리고 “대통령이 되기 훨씬 전부터 그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개성 넘치고, 강인하며 훌륭한 사람이었다”고 적었다. 조란 맘다니 뉴욕 시장은 “그는 행진하고, 달리고, 조직하고, 정의를 거리낌 없이 설파했다”고 했다 조 바이든 전 대통령은 그를 “하나님과 백성의 사람”이라고 했고,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은 “더 나은 미국, 더 밝은 미래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며 추모했다.

유족으로는 아내 재클린과 여섯 자녀(산티타, 제시 주니어, 조너선, 유세프, 재클린, 애슐리), 손자녀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