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와 독일, 스페인이 참여하는 유럽의 6세대 전투기 합작 사업인 ‘미래전투항공시스템(FCASㆍFuture Combat Air System)’이 출범 12년만에 시제기(試製機) 한 대 만들지 못하고 ‘사망’ 위기에 빠졌다.
모두 1000억 유로(약 160조 원)가 들어가는 FCAS 사업은 2014년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 앙겔라 메르켈 당시 독일 총리가 합의해 출범시켰고, 이후 스페인이 추가로 참여했다. 크게 ▲차세대 전투기 부문과 ▲자율적으로 가동하는 무장 드론떼 ▲전투기와 드론 등 FCAS 구성요소들을 연결하는 통신 시스템인 ‘전투 클라우드(Combat Cloud)’로 나뉜다.
FCAS는 영국ㆍ이탈리아ㆍ일본의 6세대 전투기 합작 사업인 ‘글로벌전투항공프로그램(GCAPㆍGlobal Combat Air Programme)과는 별개 프로젝트다.
유럽은 영국ㆍ독일ㆍ이탈리아ㆍ스페인 4국 주도로 4세대 기반 전투기인 유로파이터 ‘타이푼’을 만들어 2003년부터 배치한 이래, 자체적으로 5세대 전투기를 만든 경험이 없다. 따라서 6세대로 바로 건너뛰려는 이 프로젝트가 실패하면, 러시아 위협이 날로 커지는 상황에서 기술 독립은커녕 미국의 군사 의존성에서도 결코 헤어날 수가 없다.
그러나 유럽과 미국 매체에선 최근 “모두가 말만 하지 않을 뿐, FCAS는 죽었다” “마크롱 대통령이 살리고 싶어하지만 역부족”이란 보도가 잇따르고 있다.
이 배후엔 1960년대 초음속 전투기 미라지와 최신 다목적 전투기 라팔을 제조하는 프랑스의 대표적인 전투기 제조사인 다쏘 항공(Dassault Aviation)이 있다. 애초 합의에서 다쏘는 6세대 유인 전투기를, 독일의 에어버스 방산부문 법인은 드론과 전투클라우드를 제조하기로 했다.
그러나 다쏘 측은 유인 전투기 제조와 전체 프로젝트의 주도권을 자사가 쥐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독일 측과 줄곧 마찰을 빚었다. 전투기 관련 주요 기술 공유도 거부했다. 애초 프랑스가 유럽 합작의 4세대 ‘타이푼’ 사업에 참여하지 않은 것도, 다쏘가 전투기 설계 주도권과 생산물량 대량 확보 등을 요구하며 타협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또 기술 공유 이슈 외에도, 프랑스는 6세대 주력 전투기로 항모(航母)에서도 뜰 수 있는 경량급을, 독일은 원거리 비행이 가능한 중량급을 원한다.
일반적으로 전투기 제조 기술은 프랑스가 우위에 있고, 자금력은 독일이 쥐고 있다는 게 중평(衆評)이다. 그러다 보니, 독일에선 “프랑스가 독일 돈으로 자국 전투기를 만들려 한다”고 비판하고, 프랑스 다쏘 측은 “우리 혼자 만들 수 있다. 독일이 프랑스의 지적 재산권과 방위시장 점유율을 빼앗아가려 한다”고 반박한다.
독일과 프랑스 양국 정상은 그동안 수차례 만나서 이 분쟁을 해소하려고 노력했다. 이 사업을 계속 유지할 것인지 여부도 작년말까지 결정하기로 했지만, 이조차 2월말로 연기됐다. 심지어 두 나라가 6세대 전투기를 각자 만들자는 안(案)까지 나왔다. 그러는 사이, 다쏘의 CEO 에릭 트라피에는 작년 9월 이후에도 “다쏘는 드론을 포함해 A에서 Z까지 독자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기술력을 갖고 있다. 독일을 비롯한 파트너와 협력할 의향은 있지만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독일이 불평하든 말든 신경 안 쓴다. 독자적으로 만들 수 있으면 만들든지”라고 말했다.
유럽의 독자적인 군사력 확충을 주장해 온 마크롱 대통령에게 FCAS 붕괴는 큰 오점으로 남을 것이다. 프랑스의 무기조달청 책임자인 패트릭 파이유는 최근에도 기자들에게 “우리는 이 프로그램을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말했다.
다쏘는 프랑스의 주력 전투기를 만드는 회사이고, 프랑스 정부는 다쏘의 최대 고객이다.
마크롱 대통령은 오는 17일 인도를 방문해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와 114대의 라팔 전투기 구매와 관련한 최종 계약에 서명할 예정이다. 이 숫자는 인도가 보유한 기존 라팔 전투기 숫자를 능가한다(작년 5월 인도ㆍ파키스탄 분쟁에서 파키스탄의 중국제 J-10C 전투기가 라팔 3대를 격추시켰다는 보도도 있었지만, 이는 전혀 사실로 확인되지 않았다).
프랑스 정부가 최대 고객이고 대통령이 최고 세일즈맨으로 뛰는 상황이라면, 다쏘가 마크롱의 지시에 따를 법도 하다. 그러나 FACS를 둘러싼 이 난맥상은 ‘과연 누가 실질적인 결정권을 쥐고 있느냐’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이에 대해, 파이낸셜타임스는 프랑스 항공업계에선 “다쏘가 100년이 넘는 역사와 기술자 중심의 문화를 지닌 가족 기업이어서 결코 물러서지 않을 것” “대통령과 장관은 오고 가지만, 다쏘는 남아 있다”고 말한다고 전했다.
1916년 고성능 프로펠러를 발명한 마르셀 블로흐(Marcel Bloch)가 세운 다쏘의 항공기 제작 능력은 탁월한 것이 사실이다. F-16, F-22, F-35를 만든 미국의 록히드 마틴에 버금가는 위치를 프랑스에서 차지한다. 또 보수 일간지 ‘르 피가로’를 소유해 정치적 영향력도 갖고 있다.
다쏘가 만든 라팔 다목적 전투기는 프랑스 영향력이 센 아프리카 사헬(Sahel) 지역과 아프가스탄에서 실전 경험을 쌓았고, 프랑스 외에도 이집트ㆍ인도ㆍ카타르에서 운용된다.
다쏘의 핵심은 늘 설계 파트였다. 블로흐는 파시즘에 맞서는 프랑스 좌파연합인 ‘인민 전선 정부’가 회사를 국유화했을 때에도 설계 파트는 본인이 맡았고, 나치 독일 치하에서도 독일에 설계도를 넘기지 않았다. 다시 회사를 재건한 뒤에는 수차례 국유화 시도를 뿌리쳤다. 2차 대전 이후에 블로흐는 성(姓)을, 프랑스어로 ‘돌격 전차’를 뜻하는 char d’assaut이자 프랑스 레지스탕스 지휘관이었던 형의 전투명인 다쏘(Dassault)로 바꿨다.
1986년 4월 그의 장례식은 프랑스군의 기념 성지(聖地)와도 같은 레 앵발리드(Les Invalides)에서 국장(國葬)에 준하여 치러졌다. 자크 시라크 당시 총리가 조사를 낭독하고, 미라주 전투기가 상공을 날았다고 한다.
마르셀 다쏘는 사회당의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 시절인 1981년 지분의 26%를 국가에 넘겼지만,다쏘 가문이 여전히 66% 지분을 갖고 있다. 현재 CEO인 트라피에는 엔지니어 출신으로, 미라주 전투기의 혁신적 수출 성과를 토대로 자신의 입지를 다졌다.
프랑스 정부가 ‘유일한 구매자’로, 다쏘의 기술 부서에 자금과 프로젝트를 지속적으로 제공해 전문성을 유지하도록 도운 것도 사실이다.
마크롱은 작년 11월 18일 “우리는 성공할 의무가 있다…우리에 대한 신뢰의 문제”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프랑스와 독일 양국간 협상 관계자들은 임기가 15개월 밖에 안 남은 마크롱 대통령이 다쏘의 고집을 누그러뜨려 FCAS 참여를 설득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으로 본다. 마크롱의 생각을 잘 아는 한 프랑스 관리는 지난 6일 폴리티코에 “FCAS의 재출범보다는 ‘끝났다’는 발표가 더 개연성이 높다”고 말했다.
다쏘의 CEO 트라피에는 FT에 “다쏘의 문화는 수용 불가한 것은 수용하지 않는 것이다. 프랑스 이익은 다쏘의 팔을 비트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쏘의 성공을 자랑스러워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메르츠 독일 총리는 지난 5일 조르자 멜로니 이탈리아 총리를 만난 자리에서 영ㆍ이탈리아ㆍ일본의 6세대 전투기 사업인 GCAP에 참여하는 의사를 내비쳤다. 멜로니는 ‘환영’의 뜻을 비쳤지만, GCAP 사업의 주도세력은 영국의 방산업체인 BAE 시스템스다.
GCAP도 내부 사정은 그리 녹녹치 않다. 귀도 크로스토 이탈리아 국방장관은 지난 달말 영국이 GCAP 개발에서 이탈리아(레오나르도), 일본(미츠비시) 파트너들에게 첨단 기술을 공유하지 않는 것은 미친 짓”이라며, “영국의 이기심 장벽이 러시아와 중국에 엄청난 호의를 베풀고 있다”고 비난했다. 다른 나라의 자금은 필요하지만, 자국이 우위를 점하고 있는 전투기 기술은 한사코 공유하기를 꺼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