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세상에선 국제 규범과 법치보다 권력 정치와 이익이 더 큰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불확실한 정세 속 한국과 네덜란드처럼 서로를 신뢰할 수 있는 파트너의 존재는 필수적입니다”
10일 서울 중구 주한 네덜란드 대사관에서 만난 다비드 반 베일(50) 네덜란드 외무장관은 “이제 우리는 세상을 우리가 원하는 모습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이어져 온 규범 기반 국제 질서는 더 이상 자명하지 않으며, 강대국이 자국 이익을 앞세운 ‘힘의 논리’를 노골화하는 현실에 냉정한 전략적 판단을 내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현재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지정학적 변화는 다른 국가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고 자립하도록 압박하고 있다”며 “그런 방식으로 변화하는 세상에서는 친구가 필요하다”고 했다.
해군 출신인 베일 장관은 유럽의 대표적인 ‘안보통’으로 꼽힌다. 마르크 뤼터 전 네덜란드 총리의 외교·안보 정책 자문을 지냈고, 2020년부터 4년간 나토 사무총장보를 맡아 사이버 방위·하이브리드 위협 대응 등을 총괄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에는 나토의 대응 전략 수립에도 관여하는 등 유럽 안보의 최전선에서 활동해 왔다.
최근 그린란드를 놓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유럽연합 간 갈등이 격화하면서 나토 붕괴 가능성까지 거론된 데 대해 베일 장관은 “미국의 접근 방식이 더 거래적으로 변한 것은 사실”이라고 했다. 이어 그는 “친구와 동맹국을 관세로 위협하는 대신 합의에 도달해야 한다”고 했다. 앞서 트럼프 대통령은 네덜란드를 비롯해 미국의 그린란드 병합에 반대 의사를 표명한 유럽 국가에 보복성 관세 부과를 선언했다가 철회한 바 있다.
전통적 동맹인 유럽에도 ‘거래적 태도’를 보이는 트럼프 대통령에 대해 그는 “무역이나 안보 문제에서 미국이 ‘아메리카 퍼스트’를 내세우고 있지만, 그것이 꼭 우리(유럽)의 이익과 일치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라며 “안전하고 번영하는 유럽은 곧 미국의 국가 안보 이익에도 부합하기에, 이 동맹을 지키기 위해 싸울 가치가 있다는 것을 미국에 보여주는 것이 우리의 과제”라고 했다.
그는 이어 “러시아라는 공격적인 이웃을 둔 유럽에게 나토는 여전히 안보의 주춧돌(cornerstone)”이라며 “미국이 그동안 과도한 짐을 져왔다는 것을 인정하고, 유럽이 스스로 책임을 더 많이 분담함으로써 미국이 부담을 덜 수 있는 방향으로 가야한다”고 했다.
베일 장관은 현 시대를 “힘의 정치가 국제 규범을 압도하고 있는 상황”이라 정의했다. 그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나 남중국해에서 중국의 독단성에서 보듯 강대국들은 이제 규칙 기반 질서를 준수하지 않는다”며 “만약 우리가 국제 규범과 법치가 유지되어야 한다고 믿는다면,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힘을 모아야 한다”고 했다. 한국과 네덜란드를 비롯한 중견국들이 군사·경제 분야에서 협력을 통해 질서를 수호해야 한다는 의미다.
그는 “가치를 공유하는(like-minded) 중견국들이 국제사회에서 ‘임계 질량(critical mass·큰 변화가 실제로 일어나기 위해 꼭 필요한 최소한의 양)’을 형성해야 한다”며 “결국 미국 역시 이 질서의 설계자이므로, 우리 편에 합류하는 것이 그들의 이익에도 부합할 것”이라고 했다.
베일 장관은 ‘중견국 간 긴밀한 동맹’의 예시로 한국과 네덜란드 관계를 들었다. 그는 “두 나라는 민주주의 가치를 공유할 뿐만 아니라, 반도체 같은 미래 경제의 공급망에서도 함께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고 했다. 이어 “우리는 한국이 생산하는 반도체가 필요하고, 한국은 반도체를 만들기 위한 기계가 필요하다는 점에서 ‘손 안의 금(gold in our hands)을 쥐고 있는 상호 보완적인 관계”라고 했다. 반도체 완제품 생산 능력을 가진 한국과, 노광 장비 등 핵심 장비 기술을 보유한 네덜란드가 서로 대체하기 어려운 전략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과 네덜란드는 11일 외교·산업 고위급 대화에서 반도체·AI·핵심 광물 등 전략 분야에서 협력을 심화하는 것을 골자로 한 공동성명을 채택했다.
한편 베일 장관은 최근 심화되고 있는 북한과 러시아의 군사 협력에 대해서도 우려를 표했다. 그는 “네덜란드는 한국전쟁 당시 6000명의 자원병을 파견해 124명이 전사한 혈맹이자 유엔사(UNC)의 강력한 지지자로서 여전히 한반도 안보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며 “북한이 무기뿐만 아니라 인력까지 직접 파견해 우크라이나 침략 전쟁을 돕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우려스럽다”고 했다. 이어 “북한과 러시아가 위험한 관계를 끊도록 국제적 압박을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