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일 미국 버지니아주 매너서스 한 쇼핑몰 전시장에서 열린 '건쇼' 현장 모습. 수천 명의 인파가 몰리며 내부는 발디딜 틈이 없었다. /박국희 특파원

체감 온도가 영하 20도까지 떨어진 7일 버지니아주 매너서스의 한 쇼핑몰 전시장 내부는 수천 명의 인파가 뿜어내는 열기로 후끈했다. 구름 인파를 불러모은 행사의 이름은 ‘더 네이션스 건쇼(The Nation’s Gun Show)’. ‘건쇼’는 미국 전역을 순회하며 총기와 탄약, 전술 장비를 판매하는 총기박람회를 뜻한다. 행사장에는 900여대의 총기 및 관련 제품 판매대가 차려졌다. 주말을 맞아 쇼핑몰에 들른 가족 방문객부터 전문 총기 수집가까지 뒤엉킨 입구에는 대기 줄만 100m 넘게 이어졌다.

행사장 입장권 가격은 어른이 18달러(약 2만6000원), 12~17세 청소년은 9달러였다. 12세 미만 어린이는 보호자 동반 하에 무료 입장이 가능했다. 전미총기협회(NRA) 회원으로 현장에서 가입하면 입장료가 면제됐다.

미국에서 총기소유는 수정헌법2조가 보장한 국민의 기본권이다. 그러나 총기소유를 두고 “건국 초기에서부터 면면히 이어진 핵심 권리”라는 보수진영의 역사관과 “변화된 시대상황에 맞춰 규제를 강화해야 한다”는 진보진영이 인식이 오랫동안 첨예하게 맞붙었다.

7일 버지니아주 매너서스 총기 박람회 전시장에서 유모차를 끌고 온 한 아시아계 여성이 진열돼 있는 라이플(소총)을 신중하게 고르고 있다. /박국희 특파원

이 때문에 건쇼는 공화당원으로 대표되는 보수주의자들의 성역이자 정치적 결집의 장으로도 기능해왔다. 대규모 인명이 희생된 총기 난사 사건 직후 규제 목소리가 커질 때마다 이들은 “총을 빼앗기기 전에 사야 한다”는 방어적 심리로 행사장에 몰려들어 세를 과시하곤 했다. 그러나 이날 현장은 공화당을 지지하는 백인 남성들이 입장객의 대다수를 이루던 기존 건쇼의 풍경과 사뭇 달랐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건 유모차를 끌고 진열돼 있는 라이플(소총)을 뚫어지게 응시하던 아시아계 여성이었다. 그는 “최근 뉴스를 보고 남편을 설득해 나왔다. 아이를 지켜야 하니까”라면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당신도 뉴스를 들어서 알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그가 말한 뉴스는 지난달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에서 발생한 백인 남성 알렉스 프레티 사망 사건이다. 병원 간호사로 합법적 총기 소지자였던 그는 불법이민 단속에 항의하다 이민세관단속국(ICE) 요원의 총격에 사망했다. 이 사건은 진보 진영과 이민자 사회에 “공권력이 나를 지켜주지 않는다”는 공포를 심어준 기폭제가 됐다.

7일 버지니아주 매너서스 건쇼 현장의 한 총기 교육 업체가 내건 훈련 홍보 영상. /박국희 특파원

실제 전시장 곳곳에서는 수염을 기른 건장한 백인 남성들 사이로, 코에 피어싱을 하거나 머리를 파랗게 염색한 젊은이들이 눈에 띄었다. 흑인 커플이나 히스패닉 가족들이 진지한 표정으로 호신용 글록(Glock) 권총과 탄약 상자를 고르는 모습도 자주 보였다. 이전의 건쇼에서는 보기 힘든 사람들이었다.

총기 소유가 이념을 떠나 생존 문제로 인식되면서 총기 소유권을 옹호하면서도 정치적으로는 진보적 가치를 지향하는 사람들의 활동이 탄력을 받는 모습이다. 진보 성향 총기 소유권 옹호 단체인 ‘리버럴 건 클럽’에 따르면, 강경 이민 정책의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이후 이 단체 회원 수는 2700명에서 4500명으로 급증했고 총기 교육 요청은 5배 늘었다. CNN은 1일 “미네소타 사건 직후 진보 성향 총기 단체들의 훈련 코스가 전석 매진되고 수업 일정을 긴급 확대하는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고 보도했다.

과거 보수 성향 백인 남성들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건쇼 풍경은 확연히 달라졌다. 흑인 가족, 아시아계 부부, 히스패닉 청년 등 다양한 인종의 방문객들이 진지한 표정으로 자신을 지킬 총기를 고르고 있었다. /박국희 특파원

이날 전시장 한쪽의 총기 훈련 업체 부스에도 상담을 받으려는 사람들이 북적였다. 운영자 폴은 “요즘 총기 사용법을 배우려는 히스패닉 커뮤니티에서 단체로 손님들이 몰려들면서 아예 스페인어를 쓰는 직원을 따로 뒀다”고 했다. 이곳에서는 ‘소총 전투’, ‘차량 탑승 사격’, ‘발포 여부 판단’ 등 군사 훈련을 방불케 하는 수업 패키지가 1100달러(약 161만원)로 판매되고 있었다.

전시장 다른 쪽, 버지니아주의 대표적인 보수 성향 총기 옹호 단체 ‘버지니아 시민 방어 연맹(VCDL)’ 부스에는 “총이 생명을 구한다(Guns Save Lives)”는 현수막이 붙어 있었다. 이곳을 지키던 60대 백인 남성 짐씨는 알렉스 프레티 사건에 대해 “비극이지만 시위 현장에 총을 차고 간 게 실수였다”며 “연방 요원들을 자극해선 안 됐다”고 말했다.

7일 버지니아주 매너서스 건쇼에서 방문객들이 다양한 총기를 살펴보고 있다. /박국희 특파원

반면 자기 키보다 큰 장총 가방을 등에 메고 있던 한 30대 백인 여성의 생각은 달랐다. 건쇼에 처음 왔다는 그는 “뉴스를 볼 때마다 만약의 상황에 내 힘만으론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나는 체구도 작고 힘도 약해 나를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수단으로 난생처음 총을 샀다”고 했다.

보수층이 치안 불안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총을 들었다면, 진보 진영에 총은 공권력이 더 이상 자신을 지켜주지 않을 것이라는 불신이 만들어낸 생존 도구처럼 보였다. 매너서스는 2024년 대선에서 민주당 카멀라 해리스 후보가 56%를 득표한 대표적인 진보 성향 지역이다. 그러나 이날 건쇼 전시장에서는 정치적 이념과 상관없이 저마다 각기 다른 공포로 총과 탄약을 고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