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핵무기의 90%를 보유한 러시아와 미국이 핵 전력을 제한했던 ‘신전략무기감축협정(New START·뉴스타트)’이 5일 후속 협정 없이 종료됐다. 냉전 시기부터 50년 넘게 유지돼 온 ‘핵 안전판’이 사라지면서, 세계 각국이 핵 군비 경쟁에 뛰어드는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당장 유럽 각국에선 ‘자체 핵무장론’이 분출하고 있다. 최근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고(高)관세 부과와 그린란드 병합 시도에 홍역을 치른 유럽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서방 자유 진영을 지탱해온 미국과의 ‘대서양 동맹’ 붕괴를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미국의 ‘핵우산’이 더는 유럽을 보호해주지 않으리라는 위기감이 커지면서, 기존 핵보유국인 영국·프랑스에 더해 2차 대전 패전국인 독일, 전통적 중립국이었던 스웨덴까지 핵 개발 논의에 뛰어들고 있는 것이다.
◇독 총리 “유럽 핵우산 개발 논의”
프리드리히 메르츠 독일 총리는 지난달 29일 의회 연설에서 “유럽 동맹국과 공동 핵우산 개발 논의를 진행 중”이라고 했다. 최근 자체 핵 방어 체계 개발을 활발히 논의하고 있는 독일이 핵 개발 참여 가능성을 공식 언급한 것이다. 2차 세계대전 패전국인 독일의 핵 개발은 언급 자체가 금기나 다름없었다. 독일은 1990년 통일 당시의 ‘4+2 협정’(미·소련·영·프 및 동·서독)과 1969년 서명한 핵확산금지조약에 따라 자체 핵무기 개발이 금지돼 있다. 메르츠는 “독일은 핵무기를 보유하지 않을 것이며, 미국과의 핵무기 공유와도 상충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독일이 공식적으로만 핵탄두 완성품을 보유하지 않을 뿐, 마음만 먹으면 즉각 핵무장이 가능한 ‘핵 잠재력’을 갖추기 시작했다고 본다.
울프 크리스테르손 스웨덴 총리도 지난달 27일 현지 언론에 “영국·프랑스와 핵 전력 협의를 논의하고 있다”며 “위험한 국가들이 핵무기를 보유하는 한, 건전한 민주주의 국가들도 핵무기를 보유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스웨덴 안보 당국자들은 미 트럼프 행정부가 최근 발표한 국가방위전략(NDS)에서 러시아를 ‘관리 가능한 위협’으로 규정하고 유럽 내 미군 자산 축소 방침을 밝힌 것을 계기로 ‘유럽 자체 핵전력’ 필요성을 강력히 느낀 것으로 알려졌다. 스웨덴 최고 권위 신문인 ‘다겐스 니헤테르’는 사설에서 “미국 말고 다른 핵 억지력 옵션을 진지하게 논의해야 한다”고 했다.
도널드 투스크 폴란드 총리도 지난해 의회 연설에서 “핵무기를 확보해야 한다”며 “재래식 무기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했다. 그러면서 “프랑스와의 핵 공유에 대해 진지하게 논의할 수 있다”고 했다.
독일·스웨덴·폴란드 모두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 회원국이다. 적국의 침공을 받으면 미국 등 동맹국의 자동 개입이 조약에 보장돼 있다. 그러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협상 과정에서 트럼프가 동맹인 유럽을 무시하고 침략국인 러시아와 밀착하거나, 동맹국 영토인 그린란드를 탐하는 모습에 유럽 각국이 미국에 대한 신뢰를 잃고 자체 핵무장에 나서고 있는 것이다. 프랑스 싱크탱크 전략연구재단(FRS)의 브뤼노 테르트레 부소장은 “독일의 핵 전력 관련 언급은 5년 전만 해도 상상하지도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유럽 핵우산’은 현 핵보유국인 프랑스(핵탄두 290기 보유)와 영국(220기)을 축으로 논의될 전망이다. 양국은 지난해 핵공유를 골자로 한 ‘노스우드 선언’을 채택하고 군 수뇌부와 고위급 외교관으로 구성된 핵 조율 그룹을 설치했다. 프랑스는 사상 처음으로 공중 전략핵 시뮬레이션 ‘포커’ 훈련에 영국을 초청하기도 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조만간 ‘유럽 핵우산’과 관련한 연설을 할 예정이다.
◇“후속협정 착수하라” 촉구 잇따라
뉴스타트가 후속 협정 없이 종료되면서 전세계의 우려도 커지고 있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이날 성명을 발표하고 “50여년만에 러시아와 미국의 전략 핵무기에 대한 어떠한 구속력 있는 제한도 없는 세계에 직면하게 됐다”며 “후속 협정을 위한 협상에 착수하라”고 촉구했다. 레오 14세 교황도 “이 제도를 구체적이고 효과적인 방식으로 이어가야 하며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러시아 외무부는 4일 성명에서 뉴스타트 종료 책임을 미국에 돌리며 “우리는 더는 어떠한 의무나 대칭적 선언에 구속되지 않으며 원칙적으로 다음 조치를 선택할 자유가 있다”고 했다. 마코 루비오 미 국무부 장관은 “과거에 (트럼프) 대통령은 중국을 포함하지 않고는 21세기에 진정한 군비 통제를 이루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분명히 밝힌 바 있다”며 새 협정에는 ‘중국 참여’가 필수임을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