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정유업계가 베네수엘라산 원유에 다시 주목하고 있다. 세계 최대 원유 생산국이라는 지위에도 불구하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마르코 루비오 국무장관이 베네수엘라 원유의 필요성을 언급하면서 그 배경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이는 미국의 원유 생산량 문제가 아니라 정유 인프라 구조와 원유 성질 차이에서 비롯된 구조적 문제라는 분석이 나온다.

8일(현지 시각) 베네수엘라 마라카이보 지역의 마라카이보 호수에 원유 유조선이 정박하고 있는 동안 아이들이 낚시 부두에서 그물을 들고 있는 모습. /AFP=연합뉴스

8일(현지 시각)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미국에서 생산되는 원유의 대부분은 가볍고 황 함량이 낮은 경질유다. 셰일층에서 채굴되는 이 원유는 정제 비용이 낮고 품질이 균일하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미국의 주요 정유 시설들은 이러한 경질유를 기준으로 설계되지 않았다. 미국 전역의 정유 인프라는 수십 년 전 캐나다와 멕시코, 베네수엘라 등에서 수입하던 무겁고 산성이 강한 중질·고황 원유를 처리하도록 구축됐다.

특히 멕시코만 연안에 집중된 대형 정유 단지는 중질 원유 정제에 최적화돼 있다. 미국 연료·석유화학 제조업체협회에 따르면 미국 정유 시설의 약 70%는 중질 원유를 사용할 때 가장 효율적으로 가동된다. 미국 최대 정유 시설 10곳 가운데 9곳이 이 지역에 위치해 있으며, 이들 설비는 경질유만으로는 충분한 수익성을 내기 어렵다.

마르코 루비오 국무장관은 최근 ABC 방송 인터뷰에서 “멕시코만 연안 정유 시설들이 중질 원유 정제 능력 면에서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전 세계적으로 중질 원유 공급이 부족해지면서 정유 설비가 충분히 활용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정제 능력은 갖췄지만 투입할 원유가 부족한 구조적 불일치가 발생하고 있다는 설명이었다.

베네수엘라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대표적인 공급처다. 베네수엘라는 세계 최대 수준의 중질 원유 매장량을 보유한 국가다. 그러나 최근 수년간 정치·경제 혼란과 제재로 인해 석유 생산량이 급감했다. 그나마 생산되는 소량의 원유도 대부분 쿠바와 중국 등으로 수출되며 미국으로의 공급은 사실상 중단됐다.

멕시코와 베네수엘라의 대미 원유 수출이 감소하자 미국 정유업체들은 캐나다로 눈을 돌렸다. 캐나다는 오일샌드를 중심으로 중질유 생산을 확대하며 미국의 최대 원유 공급국으로 부상했다. 현재 캐나다는 다른 모든 국가를 합친 것보다 많은 원유를 미국에 수출하고 있다. 다만 캐나다산 원유 역시 물류와 환경 비용 측면에서 한계를 안고 있다.

이 때문에 미국 정유 시설을 거치는 원유의 약 40%는 여전히 수입산으로 유지되고 있다. 이는 휘발유와 디젤, 제트 연료, 아스팔트 등 다양한 석유 제품을 생산하기 위해 서로 다른 성격의 원유를 혼합해야 하기 때문이다. 단일한 경질유만으로는 정유 공정의 최적 조합을 만들기 어렵다.

미국은 원유 수출 금지가 해제된 이후 자국에서 생산된 경질유를 대규모로 해외에 수출해왔다. 동시에 정유 산업을 유지하기 위해 중질 원유 수입을 병행하는 이중 구조를 유지해왔다. 인도와 중국, 한국, 유럽으로는 미국산 경질유가 수출되고, 정유 시설에는 외국산 중질유가 투입되는 구조다.

결국 미국이 베네수엘라 원유를 다시 바라보는 이유는 에너지 부족이 아니라 정유 산업의 구조적 필요성에 있었던 것으로 분석됐다. 세계 최대 원유 생산국이라는 외형과 달리 원유의 ‘질’과 ‘정제 적합성’이 실제 에너지 정책을 좌우하는 핵심 변수로 작용하고 있음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미국의 대(對)베네수엘라 접근은 산유량 문제가 아닌 정유 인프라와 공급망 안정성 차원에서 재편될 가능성이 제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