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일 뉴욕시 맨해튼에 위치한 뉴욕남부 연방지법(SDNY)의 한 법정에 니콜라스 마두로 전 베네수엘라 대통령과 그의 아내 실리아 플로레스가 섰다. 마두로는 이름과 현 직책을 밝힌 뒤 “1월3일 카라카스의 집에서 잡혀 이곳으로 납치됐다”고 주장했다. 담당 판사가 말을 끊었다. “그 문제 모두 들여다볼 시간과 장소가 있을 것이요.”
마두로 사건을 맡은 판사는 올해 92세인 앨빈 헬러스타인 시니어 판사다. 미 연방판사는 종신직(終身職)이다. 미 헌법 3조는 탄핵 사유에 해당되는 위법 행위가 없는 한, 즉 “연방 판사가 good behavior를 유지하는 한 그 직위를 보유한다”고 명시했다.
다만 65세 이상ㆍ재직 연수 10년 이상인 연방 판사 중에서 나이와 재직 연수를 합쳐 80년이 넘으면, 원하는 경우 시니어 판사로 전환해 업무량을 줄이고 중요 사건만 맡을 수 있다.
유대계 미국인으로 컬럼비아 로스쿨 출신인 헬러스타인 판사는 64세였던 1998년 빌 클린턴 대통령에 의해 연방판사로 임명됐고, 2011년에 시니어 판사가 됐다. 그는 미 연방판사 중에서도 최고령층에 속한다. 직무가 정지됐지만 여전히 ‘현역’인 최고령 판사로는 폴린 뉴먼 연방순회항소법원 판사(98)가 있다.
◇”고집스럽게 독립적” 공화ㆍ민주에 전혀 빚이 없는 판사
헬러스타인이 마두로 사건을 맡게 된 것은, 이미 그가 2011년 베네수엘라 전(前) 정보국장에 유죄 판결을 내린 이래 베네수엘라 마약밀매 사건을 줄곧 다뤄왔기 때문이다. 2020년 마두로를 피고인으로 추가 명시한 검찰 측의 대체 기소 진행도 그가 감독했다. ‘사건의 연속성(continuity)’를 위해서, 헬러스타인이 이 사건을 맡는 것은 당연했다.
그는 트럼프나 민주당 측 모두에게 매우 껄끄러운 판사다. 한마디로 “누가 뭐라고 생각하든, 전혀 신경 안 쓰고 옛날 스타일의 자기 방식대로 일 하는”(매체 폴리티코 표현) 판사다. 공화당이든 민주당에게든 전혀 ‘정치적 빚’이 없고, 자신의 법률적 판단에 ‘정치 논리’가 영향을 미치려는 것 자체를 극혐한다.
한 전직 연방판사는 헬러스타인 판사에 대해 “올바른 일을 하려고 정말로 애쓴다. 다만 뭐가 옳은가에 대한 자신만의 기준이 확고하다”고 말했다. 그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많은 변호사는 익명으로 미 언론에 “고집스럽게 독립적”이라고 말한다.
◇트럼프와의 악연(惡緣)
트럼프 대통령은 2016년 미 대선 직전에, 과거 포르노 여배우 ‘스토미 대니얼스’와의 성관계 사실을 은폐하려고 자신의 변호사를 통해 이 여배우에게 먼저 ‘입막음 돈(hush money)’를 주고 재임 중에 이 변호사에게 이 돈을 변제하면서 변호사의 ‘사업상 수익’으로 변질시켰다. 트럼프는 이에 따라 뉴욕주 법원에서 배심원 유죄 평결을 받았다.
그러자 트럼프 측 변호사들은 이를 면책특권이 있는 ‘대통령 직무수행’이라며, 연방 법원으로 이관하려고 했다.
헬러스타인 판사는 두 번이나 이를 막았다. 그는 포르노 배우에게 “지급된 입막음 자금을 변호사에게 변제한 행위는 헌법상 대통령의 직무 수행으로 볼 수 없다. 또 그 변제를 은폐하려고 사업 기록을 위조해 트럼프의 사업 경비로, 변호사의 소득으로 둔갑시키는 행위도 대통령의 직무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고 판결해 사건이 주(州)법원 관할에 남도록 했다.
그러나 2024년 연방대법원은 헬러스타인에게 해당 판단을 재검토하도록 판결했고, 이 탓에 미 법조계에선 대통령의 직무상 면책특권의 ‘새로운’ 기준을 놓고 논란이 일었다.
헬러스타인은 또 작년 5월 트럼프 행정부가 갱단원으로 의심되는 베네수엘라인 2명을 ‘적국(敵國) 외국인(Alien Enemies)법’을 적용해 추방하려는 것에 대해서도, 임시접근금지명령을 내려 추방 대상자가 적법 절차를 보장받기 전에는 추방되지 못하도록 했다.
그는 오바마 행정부 때에는, 미군이 이라크의 아부그라이브 군교도소에서 이라크인 구금자를 고문한 사진들의 공개를 무차별적으로 막자, “개별 사진별로 적법 사유를 증명하라”고 판결했다. 결국 198장의 고문 흔적 사진이 공개됐다. 2024년 11월 아케고스 캐피탈 설립자인 한국계 빌 황에게 징역 18년형을 선고한 사람도 헬러스타인 판사였다.
◇”워싱턴은 전혀 신경 안 쓴다” 미 뉴욕남부 연방지법
헬러스타인이 속한 뉴욕남부 연방지법(SDNY)는 흔히 ‘어머니 법원(Mother Court)’이라 불린다. 미국에서 대통령, 외국 정상과 관련된 사건, 월가의 굵직한 금융범죄, 국제 마약 카르텔 사건을 가장 많이 다루는 법원이기 때문이다. 내부적으로는 정치적 파장이 큰 재판일수록, 이미 명성과 독립성이 확고하고 꼬장꼬장한 시니어 판사들에게 맡긴다는 비공식적인 룰이 있다고 한다.
미국의 최고 법원은 연방 대법원이지만, 초대형 사건의 출발점은 거의 항상 SDNY다. 그래서 미국의 실질적인 ‘최고 형사법원’이라는 말도 듣는다.
SDNY 연방판사들은 공공연히 “워싱턴은 신경 쓰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도 그럴 것이, 다른 연방법원 판사들과 마찬가지로 대통령 추천 때부터 특정지역 연방법원으로 배정돼 상원 전체 투표로 임명이 확정된다. 대통령은 통상 뉴욕주 연방상원으로부터 후보를 추천받는다. 한번 SDNY 연방판사가 되면, 종신직으로 이 명예로운 SDNY의 판사로 남는다.
SDNY는 특히 헬러스타인(92)ㆍ제드 라코프(83)ㆍ루이스 캐플란(81) 등 3명의 시니어 판사가 트로이카를 이루며 사법적 독립성을 지킨다. 어떠한 정치적 보상이나 승진에서 자유로우니, 정권이나 여론, 언론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다.
멕시코의 마약왕 호아퀸 ‘엘 차포’ 구즈만, 온두라스의 전 대통령 후안 올란도 에르난데스, 650억 달러라는 역사상 최대 규모의 폰지(Ponzi) 사기를 저지른 버나드 메이도프 등이 다 이곳에서 선고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