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미의 좌파 맹주’를 자처하며 반미(反美) 선봉에 섰던 베네수엘라 정권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강력한 경고에 사실상 무릎을 꿇었다.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이 미 당국에 의해 전격 체포·압송된 직후만 해도 “미 제국주의에 맞서 싸우겠다”며 결사항전을 외치던 베네수엘라 임시 지도부가 불과 사흘도 안 돼 태도를 180도 바꿔 미국에 손을 내민 것이다.

4일 카라카스 부통령청사에서 각료회의를 주재하는 베네수엘라 델시 로드리게스 부통령(가운데). 왼쪽은 베네수엘라 국방장관 블라디미르 파드리노 로페스, 오른쪽은 베네수엘라 내무·사법·평화부 장관 디오스다도 카벨로. (미라플로레스 궁 보도실)/ AFP 연합뉴스

베네수엘라를 실질적으로 이끌고 있는 델시 로드리게스 대통령 권한대행 겸 부통령은 4일(현지 시각)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미국과 상호 존중하는 관계를 원한다”며 공개적인 협력을 제안했다. 외교가에서는 미국의 압도적인 ‘힘의 우위’ 앞에 베네수엘라 잔존 세력이 정권 붕괴를 막기 위해 백기 투항을 선택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로드리게스 권한대행은 이날 성명에서 “우리는 미국이 국제법 틀 안에서 공동 발전을 지향하는 의제를 중심으로 우리와 협력할 것을 요청한다”고 밝혔다. 특히 눈에 띄는 점은 그가 평소 고수하던 스페인어가 아닌 ‘영어’로 성명을 작성했다는 것이다.

그는 성명 서두에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께(To President Donald Trump)”라고 직접 수신인을 명시하며 “우리 국민과 지역은 전쟁이 아니라 평화와 대화를 누릴 자격이 있다”고 호소했다. 이어 “주권 평등과 내정 불간섭을 전제로, 미국과 베네수엘라가 균형 있고 상호 존중하는 국제 관계로 나아가는 것을 우선시한다”고 덧붙였다. 사실상 마두로 없는 베네수엘라의 안위를 보장받기 위한 ‘생존 신호’로 해석된다.

4일(현지 시각)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사저가 있는 플로리다주에서 백악관으로 돌아오는 전용기에서 기자 회견을 갖고 있다./AFP 연합뉴스

주요 외신들은 베네수엘라의 이 같은 급격한 태세 전환을 비중 있게 보도하며, 그 배경에 트럼프 행정부의 강력한 압박이 작용했다고 분석했다.

AP통신은 “이번 주말 트럼프 행정부에 강경한 저항 의지를 드러냈던 로드리게스가 일요일 밤 극적인 어조(tone) 변화를 보였다”며 “이는 단순한 외교적 수사가 아니라, 정권 붕괴 위기 속에서 나온 다급한 메시지”라고 지적했다. 로이터통신은 익명의 미 국무부 관계자를 인용해 “로드리게스 대행이 마두로의 체포 과정을 지켜보며 다음 타깃은 자신이 될 수 있다는 극심한 공포를 느꼈을 것”이라고 보도했다. 실제로 미 법무부는 마두로 체포 당시 측근들에 대한 추가 기소 가능성을 열어둔 상태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베네수엘라 내부 사정에 정통한 소식통을 인용해 “현재 카라카스(베네수엘라 수도) 내부는 마두로 부재로 인한 권력 공백과 군부 동요로 극심한 혼란 상태”라며 “로드리게스는 미국과의 협상을 통해 자신의 안전을 보장받고, 과도 정부의 수반으로서 인정받기를 원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번 사태에는 트럼프 대통령 특유의 ‘톱다운(Top-down)’식 압박이 주효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앞서 로드리게스 대행은 마두로 체포 직후 비상 내각회의에서 “우리의 유일한 대통령은 마두로”라며 석방을 요구했고, 트럼프 대통령의 베네수엘라 관련 발언에 대해 “우리는 그 어떤 나라의 식민지도 되지 않을 것”이라며 날을 세웠다.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이 미국 당국에 체포된 뒤 미국 뉴욕에 압송된 모습이 공개됐다. / ABC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이 언론 인터뷰를 통해 로드리게스를 콕 집어 “(미국에 협조하는) 옳은 일을 하지 않는다면 매우 큰 대가(very big price)를 치르게 될 것” “처신을 똑바로 하는 것이 좋다”고 공개 경고하자 상황은 급반전됐다. 미 해군이 카리브해 인근에서 작전 활동을 강화했다는 미확인 정보까지 현지 소셜미디어를 통해 확산되면서 지도부의 불안감은 극도로 고조된 것으로 보인다.

일각에서는 이번 성명이 베네수엘라의 완전한 항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시간을 벌기 위한 전술일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하지만 최고 통치자가 미국에 구금된 초유의 상황에서 대행 체제가 미국의 요구를 거부하며 버티기는 사실상 불가능할 것이라는 게 중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