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에서 유서깊은 옛 왕립 조폐국(Royal Mint Court) 건물을 중국 대사관으로 탈바꿈하는 계획을 두고 행정부와 국민 사이 팽팽한 줄다리기가 벌어졌다.
3일(현지시각) 더 타임스와 BBC 등 현지 매체에 따르면 영국 정부는 이달 10일로 예정됐던 런던 주재 중국 대사관 신축 승인 결정을 내년 1월 20일로 연기했다. 벌써 세번째 발표 연기다.
중국이 구상하는 런던 신축 대사관은 규모 면에서 기존 외교 공관을 아득하게 뛰어넘는다. 면적만 약 2만㎡(약 6000평)에 달해 유럽 전 대륙을 통틀어 단일 국가 대사관으로 최대 규모다. 중국은 2018년 2억 5500만 파운드(약 4400억 원)를 들여 이 부지를 매입했다. 리모델링과 건물 신축으로 확보하려는 건물 총면적(연면적)은 약 5만 6000㎡(약 1만 7000평)다. 현재 런던 포틀랜드 플레이스에 있는 기존 주영 중국 대사관을 포함해 런던 시내 7곳에 흩어져 있는 중국 외교 시설을 모두 합친 것보다 10배 이상 큰 규모다.
서울 명동 주한 중국대사관과 비교해도 부지 면적에서 명동보다 2배, 건물 연면적에서 3배 이상 크다. 명동 주한 중국대사관은 24층짜리 고층 타워 형태로 부지 면적은 9871㎡, 연면적은 1만 7199㎡다. 계획대로 라면 런던 신축 주영 중국 대사관은 명동 중국 대사관 세 개를 합쳐 놓은 거대한 차이나 타운이 될 전망이다.
단순히 덩치만 큰 게 아니다. 내부에는 외교관 숙소 200여 개와 대규모 문화교류 센터, 비자 발급 센터가 들어선다. 상주인원은 수백 명에 달한다. 영국 싱크탱크 채텀하우스 분석에 따르면 이 거대한 시설은 단순한 외교 업무를 넘어선 ‘복합 요새’ 기능을 수행할 가능성이 크다. 전문가들은 이 정도 규모라면 대사관이 아니라 하나의 작은 도시가 런던 심장부에 박히는 것과 같다고 지적했다.
영국 보안 당국과 지역 주민들은 건물 위치를 가장 치명적인 문제로 지적했다. 신축 중국 대사관 예정지 지하에는 세계 금융 중심지 시티 오브 런던(City of London)과 카나리 워프(Canary Wharf)를 연결하는 핵심 광섬유 케이블과 통신 교환국이 지난다. 이 설비는 하루 수조 원대 금융 데이터가 오가는 영국 경제의 디지털 혈관이다.
전직 영국 육군 정보 장교이자 보안 전문가 필립 잉그램은 호주 ABC 뉴스 인터뷰에서 “중국 정보기관의 최우선 수집 목표는 첫째도 경제, 둘째도 경제, 셋째도 경제”라며 “금융 데이터가 흐르는 길목에 거대한 내부자 위협(insider threat)을 심어주는 꼴”이라고 전했다. 그는 “중국이 첨단 장비를 동원해 이 케이블에 물리적으로 접근하거나 데이터를 가로챌 경우, 영국 금융 시스템 전체 기밀이 실시간으로 베이징으로 흘러 들어갈 수 있다”고 덧붙였다.
BBC에 따르면 중국이 영국 당국에 제출한 설계도면 중 일부 구역, 특히 지하시설 등 민감한 부분은 ‘보안상 이유’를 들어 검게 가려져(redacted) 있다. BBC는 전문가를 인용해 “타워햄릿 의회에 제출한 도면을 보면 지하실과 일부 층 용도가 명시되지 않았다”며 “이 밀실들이 도청이나 감청, 혹은 2022년 맨체스터 영사관 사건처럼 반체제 인사를 구금하거나 신문하는 시설로 쓰일 수 있다는 의혹이 증폭되고 있다”고 했다. 2022년 맨체스터 영사관 사건은 맨체스터 주재 중국 영사관 소속 외교관들이 홍콩 민주화 시위대를 영사관 부지 내로 끌고 가 집단 폭행한 초유의 사태다.
명백한 안보 우려에도 영국 정부는 중국 눈치를 보고 있다. 키어 스타머 총리가 이끄는 노동당 정부는 브렉시트(Brexit) 이후 심화한 경제 침체를 타개하기 위해 중국과 무역 재개가 절실하다. 중국은 영국에 3대 교역국이다. 스타머 총리는 최근 런던 금융가 연설에서 “중국과 관계를 끊는 것은 국익을 저버리는 직무 유기”라며 경제 협력 의지를 뚜렷하게 드러냈다.
또한 영국 정부는 런던 곳곳에 흩어진 중국 공관 7곳을 한곳에 모으는 것이 오히려 보안 감시와 관리에 유리하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영국 정보기관 MI5와 MI6도 초기 우려와 달리 최근 “광케이블 이설이나 차폐 조치 등을 통해 보안 위험을 기술적으로 관리할 수 있다”며 사실상 조건부 승인 쪽으로 입장을 선회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블룸버그는 전문가를 인용해 “영국 정부가 경제적 이익을 위해 안보 우려를 덮으려 정보기관을 방패막이로 삼고 있다”며 “정보 기관이 (중국 대사관 설립이) 괜찮다고 한 이유가 안보 문제가 해결되어서가 아니라 정부의 압박 때문일 수 있다”고 했다.
영국 정부가 대사관 신축 승인 결정을 내년 1월 20일로 미룬 배경에 대해서도 언론은 ‘스타머 총리 1월 베이징 방문 일정에 연동한 정치적 결정’이라고 해석했다. 가디언은 “스타머 총리가 시진핑 주석을 만나기 전, 빈손으로 갈 수 없으니 ‘대사관 승인’이라는 선물을 안겨주려는 계산이 깔렸다”고 분석했다. 루크 드 펄포드 대중국의회간연합(IPAC) 대표는 로이터에 “끝없는 결정 연기는 중국을 더 화나게 할 뿐”이라며 “정부가 차라리 단호하게 거절하고 끝내야 한다”고 했다.
강대국들은 주요국 수도 대사관 크기를 국력 과시 수단이자 첩보 활동 거점으로 활용해 왔다. 미국이 레바논 베이루트에 짓고 있는 신축 대사관은 부지 면적만 17만 4000㎡로 백악관 2.5배, 축구장 21개 크기다. 경제 파탄 상태인 레바논 상황과 맞지 않게 호화롭고 거대해 현지 주민들로부터 “점령군 사령부 같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라크 바그다드 미국 대사관 역시 바티칸 시국과 맞먹는 규모로 유명하다.
러시아(구소련) 역시 냉전 시절 동독 베를린 중심가 운터덴린덴에 거대한 대사관 복합단지를 지었다. 이 시설은 유럽 내 스파이 활동 허브로 쓰였다. 러시아는 소련 시절 프랑스 파리에서도 자국 대사관 확장을 위해 핵심 요지 땅을 얻어낸 전례가 있다.
이번 런던 사례는 성격이 조금 다르다. 과거 사례는 주로 분쟁 지역 내 군사적 거점이나 정치적 상징성을 확보하려는 차원에 가까웠다. 반면 이번에 신축하는 중국 대사관은 경제 정보 탈취와 해외 반체제 인사 감시라는 실질적인 위협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런던대 아시아·아프리카대(SOAS) 스티브 창 중국연구소장은 ABC 인터뷰에서 “중국은 영국 내 반중 활동가들을 감시하고 압박하기 위한 물리적 거점이 필요하다”며 “200명이 넘는 직원이 상주하는 대사관은 단순한 외교 공관이 아니라 거대한 정보 수집 기계가 될 것”이라고 했다.
한편 중국 외교부는 영국 정부 측 승인 결정 연기에 “정당한 이유 없는 지연”이라며 “영국은 제발 정신 차리고 빨리 승인 도장을 찍으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