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에서 22~23일 이틀간 열리는 G20(20국) 정상회의가 시작도 전부터 삐걱대고 있다. 이번 회의는 G20 정상들이 역사상 처음으로 아프리카에서 집결한다는 의미가 있다. 하지만 G20 창설의 주역이자 내년 의장국인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남아공 흑인 정권이 소수의 백인을 탄압한다며 회의를 통째로 보이콧하는 전례 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트럼프는 지난 8일 소셜미디어 트루스소셜에 “G20 정상회의가 남아공에서 개최된다는 건 정말 부끄러운 일”이라며 전면 보이콧 방침을 밝혔다. 일각에서 거론되던 J D 밴스 부통령의 참석도 무산됐다.
여기에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까지 남아공행을 포기하면서 ‘미·중·러 정상이 동시에 불참하는 첫 G20 정상회의’로 기록될 전망이다.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충격을 극복하기 위한 선진국·중견국·신흥경제국 협의체로 존재감을 높여온 G20이 근본적인 위기에 봉착했다는 분석도 나온다.
보통 다자 정상회의는 주최국 주도로 사전에 의제가 설정되고 정상 선언문 초안이 마련되는 등 ‘사전 시나리오’가 어느 정도 정해져 있기 마련이지만, 이번 회의는 개막을 코앞에 두고도 어떤 방식으로 전개될지 불투명한 상황이다. 회의 보이콧을 선언한 미국의 어깃장 때문이다. 20일 남아공 현지 매체들에 따르면 미국 정부는 최근 남아공 정부에 공문을 보내 “의장국인 남아공 정부가 제시한 G20 우선 과제가 우리의 정책적 입장과 충돌하기 때문에 합의 문서에 대해 지지할 수 없다”고 밝혔다. 회의가 열리기도 전부터 이번 G20에 나온 합의 내용을 모두 배척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미 정부는 “우리 동의 없이 합의된 공동 입장을 전제로 한 문서 채택에 반대한다”며 “미국의 불참을 명확하게 밝힌 ‘의장 성명’만 인정하겠다”고도 알렸다. 각국 정상들의 총의(總意)를 담은 정상 선언을 아예 채택하지 말라고 요구한 것이다.
미국의 요구 사안이 알려지자 남아공은 격앙했다. 시릴 라마포사 대통령은 “한 국가의 지리적 위치나 군사력이 발언권을 결정해선 안 된다”며 “미국이 세계 최대 경제국 역할을 스스로 포기하고 있다”고 했다. 외무부 대변인도 “우리는 강압에 굴복하지 않는다”며 “회의에 참석하지 않는 미국이 G20 회의 결과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다”고 했다.
올해 초 트럼프의 재집권 뒤 미국과 남아공은 여러 차례 파열음을 냈다. 트럼프는 지난 2월부터 남아공 흑인 정부가 소수 백인들의 사유지를 몰수하는 등 차별 정책을 펼친다고 주장해오며 G20 관련 행사에 담당 각료를 불참시켰다. 5월에는 워싱턴 DC 백악관에서 라마포사와 만나던 중 남아공의 백인 차별을 언급하며 노골적으로 모욕 주는 장면이 생중계되며 파문을 불렀다. 당시 트럼프가 ‘물증’으로 제시한 동영상은 해당 사안과 무관한 엉뚱한 장면으로 드러나는 등 후폭풍이 적지 않았음에도 트럼프 행정부는 남아공 소수 백인들을 난민으로 수용하는 등 흑인 정권 적대시 입장을 바꾸지 않았다. 메일 앤드 가디언 등 현지 매체들은 “미국이 자기가 아쉬울 때 G20를 활용해 놓고, 이제는 어깃장을 놓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런 상황에 이른 데는 남아공이 빌미를 제공한 측면이 있다는 지적도 있다. G20의 아프리카 쪽 구성원은 남아공과 아프리카연합이다. 개별 아프리카 국가로는 유일한 G20 구성원인 남아공 정부는 ‘안방’에서 처음 열리는 이번 정상회의에서 ‘글로벌 사우스(남반구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에 위치한 개발도상국)’의 요구를 대거 앞세웠다. 기후 재난 대응력 강화, 저소득국 부채 관리, 공정한 에너지 전환 자금 조달, 핵심 광물 활용 등이 대표적이다. 대체로 서방 선진국의 국제적 책임을 강조하고, 경제적 부담을 키우는 내용이다. 그리고 이들 의제와 관련해 선진국들의 양보를 담은 ‘요하네스버그 정상 선언’을 채택하려 하고 있다.
남아공 정부가 이 같은 의제 설정을 고수한 것에 대해 “기후 위기를 부정하고 다자주의를 회의적으로 바라보는 트럼프 행정부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우려도 적지 않았다. 결국 미국이 단순한 회의 보이콧에 그치지 않고 정상 선언 채택을 선제적으로 봉쇄하면서 회의가 제대로 진행될지 우려하는 시선은 더욱 커지고 있다.
이번 G20 정상회의에 중국과 러시아에서는 리창 총리와 막심 오레슈킨 부비서실장이 각각 자국을 대표해 참석한다. 트럼프와 각별한 하비에르 밀레이 아르헨티나 대통령도 불참키로 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 프리드리히 메르츠 독일 총리 등 유럽연합 주요국 정상들은 예정대로 참석한다. 트럼프는 내년 미국이 의장국으로 주최하는 G20 정상회의는 자신이 소유한 플로리다주 마이애미의 도럴 골프 리조트에서 개최하고 미국의 입장을 의제에 반영하겠다는 뜻을 밝혀왔다. 이에 따라 내년 회의는 지금처럼 어수선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관측이 벌써부터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