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은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폭발 사고로, 아내는 러시아의 드론(무인기) 공격으로. 39년의 세월을 사이에 두고 우크라이나 현대사의 두 비극에 휩쓸려 목숨을 잃은 부부의 사연이 알려져 연민을 자아내고 있다.
우크라이나 국가통제구역관리청은 16일 “체르노빌 사고의 첫 희생자인 발레리 호뎀추크(당시 42세)의 아내 나탈리야 호뎀추크(73)가 러시아의 공습으로 숨졌다”고 발표했다. 국가통제구역관리청은 1986년 체르노빌 사고로 오염된 지역을 관리하고 피해자 및 유가족 지원을 담당하는 기관이다. 관리청 측은 “이날 키이우로 날아든 러시아의 자폭 드론 수백 대 중 하나가 나탈리야가 살던 아파트에 떨어졌다”며 “그는 상반신과 얼굴 등 전신의 45%에 심각한 화상을 입고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끝내 사망했다”고 전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도 X에 “호뎀추크 여사의 죽음은 크렘린이 초래한 새로운 비극”이라며 “체르노빌의 재앙에서 살아남아 국가 재건에 힘을 보탠 이들이 이젠 침략국(러시아)의 테러라는 위험에 직면하고 있다”고 썼다.
◇원전 사고와 전쟁… 우크라의 비극
나탈리야가 살던 아파트는 키이우 동북부의 ‘체르노빌 하우스’라고 우크라이나 매체들은 전했다. 체르노빌 원전 사고 생존자와 희생자 유가족들이 살고 있어 이런 이름이 붙었다. 드론이 아파트 외벽을 들이받고 폭발하자 여러 층에 불이 번졌고, 나탈리야의 집을 포함한 수십 채가 완전히 불탔다. 영국 일간 가디언 등은 “체르노빌 피해자와 유족 수십 가구가 집을 잃었다”며 “원전 사고에 이어 전쟁으로 두 번이나 삶의 터전을 잃게 된 셈”이라고 전했다. 이날 공습으로 키이우에서 최소 7명이 사망하고 40여 명이 부상했다.
사고 직후 나탈리야는 남편을 찾아 병원과 영안실을 전전하다 아이들과 함께 강제 대피 명령을 받았다. 당시 원전 인근 2600여㎢가 방사능에 오염돼 30만명이 간단한 옷가지만 챙겨 집을 떠나야 했다. 그는 이후 키이우 외곽에서 홀로 아들과 딸을 키우면서 매년 체르노빌 추모 행사에 참석했고, 사고를 조명한 다큐멘터리에도 여러 차례 등장하며 체르노빌의 비극을 상징하는 인물 중 하나가 됐다. 2022년 2월 러시아의 전면 침공 때는 자녀들과 함께 피란을 갔다가 다시 키이우의 집으로 돌아왔고, 이후 이곳에서 홀로 지내다 변을 당했다. 국가통제구역관리청은 추모 글에서 “체르노빌의 참화 속에 남편을 잃고 홀로 두 자녀를 키우며 운명과 맞서 온 여인이 러시아의 또 다른 만행에 생을 마감했다”고 했다.
호뎀추크 부부의 이야기에 많은 우크라이나인이 가슴을 쳤다. 남편 발레리는 체르노빌 사고 당시 폭발한 4호기의 북쪽 순환 펌프실에서 야간 근무 중이었다. 원자로 폭발의 충격으로 펌프실이 붕괴되면서 그대로 매몰됐다. 노심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던 탓에 구조대는 아예 접근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고 한다. 이후 방사능 누출을 막으려 4호기를 감싸는 콘크리트 덮개가 씌워지면서 발레리가 매몰된 지하 공간은 영구 봉인 구역이 됐다. 결국 그는 사고의 첫 희생자이자, 시신을 찾지 못한 유일한 작업자로 남았다.
◇“러시아의 폭력 되풀이되는 중”
옛 소련이 키이우 북쪽 90여㎞ 지점에 건설한 체르노빌 원전은 1986년 4월 26일 설계 결함과 무리한 가동 시험으로 폭발, 히로시마 원폭의 약 400배에 이르는 방사능을 누출했다. 지금까지도 역사상 가장 치명적인 원전 사고로 거론된다.
우크라이나에서는 체르노빌 사고를 러시아의 ‘핵 식민주의’로 인한 사건이라고 보는 시각이 많다. 소련이 원전을 러시아 본토가 아닌 우크라이나 등 주변부에 배치해 발전 혜택은 모스크바 등 러시아 대도시가 가져가고, 사고 위험과 방사능 오염은 현지 주민에게 떠넘겼다는 것이다. 이런 비판이 1930년대 스탈린 정권 당시 수백만 명이 목숨을 잃은 ‘우크라이나 대기근’, 지금의 러시아 침공과 맞물리면서 러시아의 식민·제국주의적 폭력이 반복되고 있다는 역사적 인식으로 이어지고 있다.
스웨덴 일간 다겐스니헤테르는 “남편은 소련 체제의 비극인 체르노빌에서, 아내가 푸틴 시대 러시아의 전쟁 범죄로 목숨을 잃었다”며 “한 가족의 40년에 걸친 비극이 우크라이나라는 나라의 운명과 겹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