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권력 서열 3위인 하원의장을 여성 최초로 지낸 낸시 펠로시(85·민주) 의원이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펠로시 의원은 6일(현지시각) 자신의 선거구인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 유권자들에게 보낸 영상 연설에서 “내년 11월 열릴 하원 선거에 불출마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1987년 정계 입문 후 40년간 이어온 의정 활동을 2027년 1월 임기 종료와 함께 마칠 예정이다.

펠로시 의원은 이날 은퇴 의사를 밝히면서 “내가 사랑하는 도시에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다. 샌프란시스코, 당신의 힘을 알아야 한다”며 “우리는 역사를 만들었고, 진전을 이뤘으며, 언제나 앞서왔다”고 강조했다. 이어 “이제 우리는 민주주의에 적극 참여하고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미국의 이상을 지켜내는 싸움을 계속함으로써 그 길을 이어가야 한다”고 당부했다.

낸시 펠로시 미국 하원의장이 2007년 1월 사상 최초의 여성 하원의장으로 선출된 후 연단에 올라 환호하고 있다. /연합뉴스

펠로시 의원은 미국 정치 사상 최초이자, 현재까지 유일한 여성 연방 하원의장이다. 유리천장이 견고했던 남성 중심 미국 정치권에서 여성으로 최고위직을 개척한 상징적 인물로 평가받는다.

진보 성향이 강한 샌프란시스코를 지역구로 둔 펠로시 의원은 1987년 47세에 정계에 입문했다. 가정주부로 지내다 비교적 늦은 나이에 워싱턴 무대에 발을 들였다. 하지만 곧 강력한 정치력과 자금 동원력을 바탕으로 입지를 넓혔다.

2003년 하원 민주당 원내대표로 선출된 뒤 20년간 하원 민주당을 이끌었다. 그중 8년은 두 차례(2007~2011년, 2019~2023년)에 걸쳐 하원의장을 지냈다. 정치 전문매체 악시오스는 펠로시 의원이 “엄청난 액수의 정치 자금을 모금하는 능력과 효과적인 입법 전략가로 유명했다”고 평가했다.

그의 입법 성과는 뚜렷하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 시절 ‘오바마케어(건강보험 개혁)’ 입법을 주도했다. 조 바이든 행정부에서는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통과를 이끌었다. 한국 관련 사안으로는 2007년 미 하원에서 일본군 위안부 결의안 통과에 주도적 역할을 하기도 했다.

특히 펠로시 의원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1기 재임 시절(2017~2021년) 강력한 대척점에 서며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두 번째 하원의장 임기 중에는 내내 트럼프 대통령과 사사건건 거칠게 대립했다. 특히 ‘우크라이나 스캔들’과 ‘의사당 난입 사태’ 등을 이유로 트럼프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두 번이나 하원에서 가결시키기도 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하단)이 2019년 2월 5일 워싱턴DC 국회의사당에서 마이크 펜스 부통령(왼쪽),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과 함께 국정연설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런 악연 탓에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펠로시 의원 은퇴 소식에 원색적인 비난을 쏟아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기자들과 만나 “그녀가 은퇴해 기쁘다”며 “나는 그녀가 사악한 여성(evil woman)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그녀가 은퇴함으로써 나라에 큰 공헌을 했다고 생각한다”며 “나는 그녀가 끔찍했다고 생각한다. 나라의 평판과 많은 피해를 입힌 형편없는 일을 했다”고 말했다.

펠로시 의원은 2022년 하원 지도부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지금까지 하원 민주당 내에서 영향력 있는 존재로 남아있었다. 은퇴 이후 펠로시의 부재는 민주당 내 역학 구도에도 적잖은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악시오스는 펠로시 의원의 퇴장을 두고 “워싱턴 DC의 한 시대가 끝났음을 의미한다”며 “그의 고향인 캘리포니아에도 심오한 정치적 반향을 일으킬 것”이라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