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백악관 내 대형 연회장(볼룸) 건설을 위해 이스트윙 철거에 착수하면서, 미국 내 비판 여론이 거세지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적절한 절차를 거치지 않은 채 역사적 건물을 임의로 철거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22일(현지 시각) CNN은 “새 연회장이 들어설 예정인 백악관 동관(이스트윙)을 철거하는 장면이 담긴 사진이 트럼프 대통령 비판자들 사이에서 격앙된 반응을 불러일으켰다”며 “건축 및 보존 단체들의 비난도 거세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미 의회가 설립한 역사보존협회는 전날 성명을 내고 “행정부와 국립공원관리청(NPS)에 연회장 계획이 법적인 공적 검토 절차를 거치기 전까지 철거를 중단할 것을 촉구한다”고 밝힌 바 있다.
백악관은 지난 20일부터 중장비를 투입해 건물 외벽 철거 작업을 시작했다. 워싱턴포스트(WP)는 자칭 ‘워싱턴 D.C. 최고의 철거업체’인 ACECO가 이번 철거를 담당하고 있다며, “이스트윙이 보호 대상이라는 증거는 없으며 남아 있는 건물 또한 철거될 가능성이 높다”고 전했다. 뉴욕타임스(NYT) 역시 두 명의 행정부 고위 관계자를 인용해 “이스트윙 철거 공사는 이번 주말 안에 완료될 예정”이라고 보도했다.
이스트윙은 1902년에 처음 지어져 오랫동안 영부인의 집무실과 비서진의 업무 공간으로 사용돼 왔다. 이후 1942년, 지하 벙커인 ‘대통령 비상작전센터(Presidential Emergency Operations Center)’를 감추기 위해 2층이 증축되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이스트윙은 수십 년 동안 백악관 방문객들의 주요 출입구로 사용돼 왔으며, 백악관 내에서도 가장 상징적이고 잘 알려진 공간 중 하나로 꼽힌다.
오랫동안 백악관 연회장 증축을 꿈꿔온 트럼프 대통령은 이스트윙 자리에 최대 999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형 연회장을 신설할 예정이다. 공사에는 약 2억 5000만 달러(약 3600억 원)가 투입되며, 연회장의 전체 면적은 약 9만 제곱피트(약 8800m²)로 현재 5만5000 제곱피트(약 5400m²)인 백악관 본관 건물의 거의 두 배에 달할 것으로 알려졌다.
공사가 시작된 날,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의 소셜미디어(SNS) 계정에 “150년 넘게 모든 대통령이 대규모 파티나 국빈 행사 때 사용할 연회장을 갖추길 바랐다”며 “그 오랜 숙원을 마침내 실현하게 되어 영광스럽게 생각한다”고 밝혔다.
이스트윙 공사에 비판이 쏟아지는 이유는 적법한 절차를 거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백악관의 구조 변경은 통상 여러 정부 위원회의 검토를 거쳐야 하지만, 이번 연회장 건설 계획은 연방 정부 청사 증축·리모델링을 관할하는 국가수도계획위원회(NCPC)의 승인조차 받지 않은 상태다. 백악관은 NCPC에 공사 계획을 제출할 예정이라고 밝혔지만, 이미 철거 작업은 시작됐다.
조지워싱턴대 법학 교수 사라 C. 브로닌은 이스트윙 철거가 연방 기관이 역사적 장소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하도록 규정한 국가역사보존법(NHPA)에 위배된다고 지적했다. 그는 “트럼프 행정부가 백악관의 일부를 철거하기 시작한 근시안적인 결정은 바로 NHPA가 제정된 이유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라고 말했다.
게다가 이스트윙 철거는 당초 트럼프 대통령이 밝힌 연회장 건설 계획과도 정면으로 배치된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7월 연회장 공사와 관련해 “현재의 이스트윙에는 전혀 지장이 없을 것”이라며 “기존 건물을 완전히 존중하는 방식으로 짓겠다”고 말한 바 있다.연회장의 수용 인원은 과거 트럼프 대통령이 언급한 최대 650명에서 999명으로 늘어났고, 공사 비용 또한 처음 발표된 금액보다 약 세 배가량 증가했다.
재원 조달 방식도 논란이 되고 있다. 당초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의 자금에 민간 기부금을 보태 공사비를 마련하겠다고 밝혔지만, 일부 기부자를 제외한 명단을 공개하지 않아 투명성 논란이 일고 있다. 또 이스트윙 옆에 있는 재무부가 직원들에게 철거 현장 사진을 공유하지 말라고 지시하면서, 이른바 ‘깜깜이 공사’ 논란도 불거졌다. WP는 “철거 현장을 직접 볼 수 있는 구역이 일반에 공개되지 않아 트럼프 행정부의 투명성 부족에 대한 비판이 커지고 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