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여권과 H-1B 비자 신청서. /로이터 연합뉴스

미국의 ‘여권 파워’ 순위가 처음으로 10위권 밖으로 밀려났다. ‘여권 파워’는 국제 법률 회사 헨리 앤드 파트너스가 매년 전 세계 199국의 무비자 협정 체결 현황을 분석해 발표하는 지수로, 여권만 있으면 비자 없이 입국할 수 있는 국가 수를 기준으로 매긴다.

헨리 앤드 파트너스가 지난 14일 홈페이지에 공개한 ‘헨리 여권 지수’(Henley Passport Index)에 따르면, 미국인은 현재 180국에서 무비자 입국이 가능해 여권 파워 순위에서 말레이시아와 함께 12위를 기록했다.

헨리 여권 지수는 유엔 회원국 193국에 대만과 마카오 등 6곳을 더해 총 199국을 대상으로 여권 소지자가 무비자 또는 입국 시 비자 발급 등 사실상 무비자로 갈 수 있는 곳을 조사해 결과를 내놓는다. 국제항공운송협회(IATA) 자료를 바탕으로 실시간 업데이트된다.

미국의 여권 파워가 10위권 밖으로 밀려난 건 헨리 앤드 파트너스가 관련 데이터를 수집해 순위를 발표한 지 20년 만에 처음이다. 미국은 2014년 같은 조사에서 1위를 기록한 이후 무비자 입국이 가능한 국가 숫자가 줄며 순위가 계속 떨어졌다. 지난 7월 공동 10위를 기록했다가 이번에 12위까지 내려온 것이다.

미국의 주요 동맹국인 영국도 여권 파워 8위로 사상 최저 순위를 기록했다. 영국은 2015년 1위를 기록하기도 했으나, 지난 7월 6위로 떨어진 데 이어 이번 조사에서 두 계단 하락한 것이다.

여권 파워 최상위권에는 모두 아시아 국가 이름이 올랐다. 1위는 싱가포르로, 여권이 있으면 193국에서 무비자 입국이 가능한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은 직전 조사 결과와 동일한 2위(190국 무비자 입국)를 기록했으며, 일본은 3위(189국)로 조사됐다. 이를 두고 헨리 앤드 파트너스는 “아시아 빅3이 정상을 굳혔다”고 표현했다.

중국은 2015년 94위에 불과했으나, 이번엔 64위(82국)로 순위가 상승했다. 지난 10년간 헨리 여권 지수에서 가장 큰 상승세를 보인 국가 중 하나라고 헨리 앤드 파트너스는 짚었다. 지난 1년 사이 30국에 대해 무비자를 추가로 허용하면서 순위가 급등했다는 분석이다.

북한은 100위(38국)에 그쳤다.

최하위권은 아프가니스탄(106위·24국), 시리아(105위·26국), 이라크(104위·29국) 등 중동 국가들이 차지했다.

미국 여권 파워의 약세는 최근 몇몇 국가에서 시행한 입국 제한 조치 때문으로 보인다. 지난 4월 브라질은 상호주의 부족을 이유로 미국·캐나다·호주 시민의 무비자 정책을 철회했다. 베트남 역시 무비자 입국 대상국에서 최근 미국을 제외했다. 아울러 중국이 독일·프랑스를 포함한 수십 개 유럽 국가 국민에게 무비자 혜택을 빠르게 늘리고 있는 것과 달리 미국이 아직 여기에 포함되지 않은 것도 순위 변동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추정된다.

워싱턴포스트(WP)는 “미국 여권 파워 강등은 트럼프 행정부가 이민 규제를 대대적으로 강화한 가운데 나타났다”고 짚었다. 불법 이민뿐만 아니라 관광·취업·유학 비자로 미국을 방문하는 사람들에 대한 심사까지 강화하는 트럼프 행정부 정책이 상호주의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헨리 여권 지수를 창안한 크리스천 H. 케일린 핸리 앤드 파트너스 회장은 “미국 여권 지수 약화는 단순한 순위 변동을 넘어 세계 이동성과 소프트 파워 역학의 근본적인 변화를 시사한다”며 “개방성과 협력을 수용하는 국가들은 앞서가지만, 과거의 특혜에 머물러 있는 국가들은 뒤처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워싱턴의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선임연구원 애니 포르차이머는 “두 번째 트럼프 임기 이전에도 미국의 정책은 내향적으로 변해 있었다”며 “이런 고립주의적 사고방식이 이제 미국 여권 파워의 약화로 나타나고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