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가 상장기업의 분기 실적 보고 의무를 폐지하는 대신 6개월 단위로 재무 정보를 공개하도록 하는 방안을 추진한다. 앞서 기업들은 분기 보고 의무를 두고 “과도한 비용과 근시안적 경영을 부추긴다”며 지속적인 불만을 제기한 바 있다.
15일 블룸버그에 따르면, 폴 앳킨스 SEC 위원장은 최근 기자회견에서 “현행 분기보고 제도는 불필요하게 기업의 행정비용을 늘리고 장기적인 경영 판단을 왜곡시킨다”며 “공시 주기를 반기 단위로 전환하는 개정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에 미국상공회의소는 성명을 통해 “이번 개정안은 기업과 주주의 부담을 덜어주는 합리적 개혁”이라며 공개적 지지를 표하는 등 재계는 반가움을 드러내는 분위기다.
분기 실적 보고 의무는 미국 상장기업들에 대해 90일마다 실적과 재무 상황을 공개하도록 규정한 제도로, 그간 기업들은 이를 두고 ‘머리 위에 놓인 칼’을 의미하는 ‘다모클레스의 검(劍)’이라 일컬어 왔다. 회계법인 오딧애널리틱스에 따르면 기업들이 분기 실적 보고 의무를 이행하기 위해 외부 감사에 들이는 비용은 연평균 200만달러(약 28억3360만원)를 웃도는 것으로 나타났다.
더 큰 문제는 기업들이 분기 실적을 달성하는 데 매몰되면서 장기적인 관점의 투자를 주저하게 된다는 것이다. 보스턴의 경영연구소 FCLT글로벌의 사라 윌리엄슨 대표는 “실적 전망치를 맞추기 위해 기업이 채용을 미루거나 광고비를 줄이는 일이 허다하다”며 “이는 장기 성장을 유예하는 셈”이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듀크대 연구진이 2004년 미국 최고재무책임자(CFO)들을 대상으로 진행한 조사에 따르면 전체 응답자 중 78%가 “분기 실적 목표를 맞추기 위해 주주가치를 희생한 적이 있다”고 답한 것으로 나타났다.
단기 실적 중심 문화는 제너럴일렉트릭(GE)의 전 최고경영자(CEO) 잭 웰치의 등장을 계기로 확산된 것으로 전해진다. 1981년 GE CEO에 오른 그는 ‘매 분기마다 실적 목표를 달성하는 회사’라는 신화를 만든 전설적 인물로, 재임 기간 내내 80분기 연속 월가 실적 전망치를 맞추며 ‘전설적 경영’의 표본을 제시한 바 있다.
다만 이 과정에서 웰치는 실적 압박을 극단적으로 조직에 내재화했다는 평가를 받는데, ‘성과 하위 10% 해고 정책(Rank and Yank)’ 또한 이 시기 탄생한 것으로 알려졌다. 웰치 퇴임 이후 GE는 회계 부정과 투자 실패 등으로 잇따라 위기를 겪었으며 결국 3개 회사로 분할되는 수순을 밟았는데, 이 또한 분기 실적 의무에 지나치게 매몰된 결과라는 분석이 제기되기도 했다.
웰치 본인 또한 2020년 별세 직전 인터뷰에서 “분기 실적 중심의 경영은 세계에서 가장 어리석은 생각이었다”며 후회를 드러낸 바 있다.
다만 일각에선 분기별 보고 의무 폐지가 시장 안정성을 해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미네소타대의 살만 아리프 교수는 “일부 국가에서 반기 보고제를 시행한 결과, 투자자들이 공백 기간을 다른 불완전한 정보로 메우려 하면서 주가 변동성이 커졌다”며 “정보 격차가 커지면 고급 데이터를 보유한 기관 투자자만 유리해져 반(半)내부자 거래 위험이 증가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시바 라즈고팔 컬럼비아대 교수 또한 “미국 자본시장이 세계 전체 시가총액의 절반을 차지하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높은 정보 투명성”이라며 “공시 주기를 늘리면 투자자 신뢰가 훼손될 수 있다”고 말했다.
한편,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SEC의 개혁 가능성에 힘을 싣는 모양새다. 트럼프 대통령은 앳킨스 위원장의 발표 이후 자신의 소셜미디어(SNS) 트루스소셜을 통해 “기업들은 더 이상 분기마다 보고할 필요가 없다”며 “이는 비용 절감은 물론 경영진이 진짜로 회사를 운영하는 데 집중할 수 있도록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