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당(독일국가사회주의노동자당) 대표인 아돌프 히틀러가 바이마르 공화국의 총리가 된 것은 1933년 1월30일이었다. 당시 나치당은 의회에서 230석을 차지한 제1당이었지만, 전체(608석)의 과반에 훨씬 못 미치는 37%였고, 나치당이 속한 우익 연합도 51%에 그쳤다.

그러나 앞서 세 명의 총리가 계속 실각하면서, 당시 대통령이자 제1차 세계대전의 영웅으로 불렸던 파울 폰 힌덴부르크와, 귀족ㆍ군ㆍ산업가들로 구성된 독일의 중도ㆍ보수적 정치기반은 어쩔 수 없이 그를 총리로 임명했다. 헌법에 따라 긴급 상황에서 총리를 해임ㆍ임명할 권한을 가진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그 전 해까지만 해도 “신(神)과 양심, 국가를 위해, 결코 히틀러를 총리에 임명하지 않겠다. 만약 어떤 공직에 임명한다면, 우체국장에 임명해 내 우표를 혀로 핥게 하겠다”고 공언했었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15번째 총리에 취임한 히틀러가 1933년 2월 첫 대국민 총리 라디오 연설을 하고 있다./게티 이미지

이렇게 무시당했던 히틀러였지만, 이후 총리 히틀러는 내각과 의회를 장악했고, 3월23일 정부가 자체 권한으로 법안을 발의ㆍ제정하는 수권법(授權法)을 통과시켰다. 이 법으로 삼권분립과 바이마르 헌법은 사실상 붕괴했다. 히틀러는 신성로마제국, 비스마르크 통일독일 제국에 이어 ‘나치 독일 제3제국’으로 치달을 수 있게 됐다.

히틀러가 총리가 된 뒤, 현대 민주주의 헌법의 모범으로 꼽히던 바이마르 헌법 체제를 사실상 무너뜨리기까지 걸린 기간은 고작 53일이었다. 이 과정에서 히틀러와 나치당은 ‘완전히’ 합법적 절차를 거쳤다. 히틀러의 선전 장관을 지냈던 요세프 괴벨스는 나중에 “민주주의의 최대 아이러니(joke)는, 민주주의를 파괴하려는 치명적인 적들에게 민주주의가 바로 그 수단을 제공한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헤이그에서 활동하는 저명한 나치독일 관련 역사학자인 티머시 W 라이백은 올해 초 미 월간지 애틀랜틱에 ‘히틀러는 어떻게 53일만에 민주주의를 해체했나’라는 분석 글을 게재했다. 도널드 트럼프의 대통령 취임을 앞둔 시점이었다. 민주주의 체제 하에서 어떻게 독재자가 ‘합법성’을 띠고 독재 정치로 나아갈 수 있는지를 짚은 글이었다.

◇MAGA 진영 일부의 ‘히틀러 재평가ㆍ복권’ 움직임

현재 미국의 진보진영에서는 독립적인 독일 중앙은행 총재 한스 루터를 계속 위협해 결국 물러나게 하고 관세를 올리고 선거관련 법을 개정하고 정치적 반대파를 탄압한 히틀러와, 트럼프가 취임 후 지금까지 취한 행보에서 유사성을 찾는다. 그리고 미국 민주주의의 붕괴를 우려한다.

반면에, 트럼프의 지지기반인 MAGA 진영 일각에선 다른 이유에서 히틀러를 ‘재평가’한다. 폭스뉴스 앵커 출신으로 트럼프 지지자인 터커 칼슨의 팟캐스트에 이달 초 출연한 코널대 화학교수인 데이비드 콜럼은 “우리가 아는 2차대전 얘기는 모두 잘못됐다. 우리는 히틀러 편을 들어 스탈린과 싸워야 했다”고 했고, 칼슨은 동조했다.

칼슨이 “오늘날 미국에서 가장 중요한 대중 역사학자”라고 칭송한 대릴 쿠퍼는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이 2차 대전의 주범이고, 나치 독일은 기껏해야 두번째”라며 “히틀러는 유럽의 평화를 원했다”고 했다. 칼슨의 아들 버클리 칼슨은 J D 밴스 부통령의 부(副)대변인으로 일한다.

MAGA 일부에서 제기되는, 히틀러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 주장에 동조하는 극우 성향 평론가인 터커 칼슨(왼쪽)과 캔디스 오언스/오언스 인스타그램

작년 7월 미국의 극우 성향 팟캐스터인 캔디스 오언스도 “히틀러가 뭐가 문제인가, 왜 그토록 악하지? 사람들이 떠올리는 것은 ‘(유대인)인종 청소가 일어날 뻔했다는 것인데, 미국이 독일인에게 할 뻔했던 것과 매한가지 아니냐”고 했다. 나치 독일의 유대인 600만 명 학살을 부인하는 주장이었다.

◇”히틀러는 법을 자기 목적에 맞게 조작하는 데 능숙”

히틀러와 나치당원들은 1923년 11월 이른바 ‘맥주홀 폭동(Beer Hall Putsch)’을 일으켰다. 제1차대전 이후 경제적 위기 속에서 특히 보수적 군국주의 기운이 강했던 바이에른 주 뮌헨의 한 맥주홀에서 주지사와 주 군사령관, 경찰청장 등을 감금하고 중앙 정부에 맞서도록 강요하는 쿠데타였지만, 실패했다.

그러나 그는 한 번도 바이마르 체제를 뒤엎으려는 꿈을 버리지 않았고, 이후 10년간 중앙 정부의 의제를 좌절시키는 정치를 펼쳤다. 자신이 바이마르 공화국의 15번째 총리에 오르기 직전까지 8개월 간 방해 정치로 세 명의 총리를 무너뜨리고 두 차례의 의회 해산ㆍ총선을 이끌어냈다.

총리가 된 히틀러는 자신이 절대 권력을 행사해야 한다고 믿었다. “37%(나치당 의석)는 51%(우익 연합)의 75%”라는 논리였다. 그는 취임 첫날, 핵심 관료들을 숙청하고 충성파로 내각을 채울 계획을 발표했고, 나치당 공약인 경제 부흥ㆍ실업률 감소ㆍ군비증강ㆍ국제조약 탈퇴ㆍ국가를 “오염”시키는 외국인 제거ㆍ정적(政敵) 복수를 위해선 수권법의 통과가 필수적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현실은 그의 야심과 거리가 있었다. 기존 정당에 속하지 않은 군ㆍ귀족ㆍ기업인들을 기반으로 한 정치 기득권 세력은 히틀러에게 경제ㆍ외교ㆍ군 관련 장관직을 주지 않았다. 나치당엔 내무장관과 무임소 장관만 주어졌다.

또 수권법이 통과되려면 의회 3분의2 이상 찬성이 필요했다. 그러나 사회민주당과 공산당이 36%를 차지해, 산술적으로 불가능했다. 유일한 방법은 공산당을 ‘금지’시키고 새로 총선을 실시하는 것이었다.

히틀러는 나치당에 주어진 내무ㆍ무임소 장관직을 최대한 활용했다. 빌헬름 프릭 내무장관은 야당과 언론을 억압했고, 연방 정부의 권한 강화를 계속 비판했다. 히틀러는 독일 영토의 3분의2를 차지하는 프로이센 주의 임시 내무장관에, 무임소 장관인 헤르만 괴링을 임명했다. 괴링은 사민당의 거점인 프로이센 주를 장악해갔고, 주 정부 경찰을 ‘정화’하고 나치 돌격대(Sturmabteilung)에 권총을 지급하고 부(副)경찰로 지정했다.

당시 프로이센 주 경찰청장이었던 루돌프 디엘스는 후에, “법을 조작해 자신의 목적을 이루고 갈색 제복의 나치당 준(準)군사조직의 폭력과 과잉 행위를 ‘합법화’한 것은 히틀러의 검증된 전술”이라고 말했다. 2차대전이 끝나고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돌격대장이었던 변호사 한스 프랑크(교수형 처형)는 “히틀러는 모든 법의 잠재적 약점을 감지해 이를 무자비하게 이용하는 데 놀라운 능력을 갖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히틀러, “뭐가 달라졌느냐” 비판과 압력에 몰려

하지만, 3월의 총선을 앞두고도 일반 유권자들은 히틀러의 ‘연립’ 내각 정책에서 변화를 느끼지 못했다. 가톨릭 중도당은 “바이마르 헌법을 준수하라”고, 중도 좌파 언론 매체들은 “히틀러가 곡물 수입 관세의 2배 인상을 공약으로 내걸면서 경제 상황이 더 안 좋아졌다”고 비판했다. 히틀러의 독재 권력 요구와 연립 거부를 지지했던 우익 지지자들도 “제3제국은커녕, 2와2분의1제국도 없다”고 실망했다.

독자적인 정치 기반을 가진 ‘늙은 원수(元帥)’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오스트리아 ‘시골뜨기 하사관’ 출신 히틀러를 얼마나 더 놔둘 것인지에 대한 전망이 분분했다. 히틀러도 자신이 이끄는 연립 내각이 ‘나치 내각’이 아니라 한계를 느꼈다.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에 즉각 공산당 금지

2월27일 밤, 수도 베를린의 국회의사당이 불길에 휩싸였다. 범인은 네덜란드 출신 공산당원이었다. 공산당은 나치의 사주를 받은 소행이라고 주장했고, 나치당은 공산당을 비난했다. ‘진짜’ 배후가 있었는지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히틀러는 다음날 이 방화를 공산당의 쿠데타 시도로 규정했고, 나치당 소속인 무임소장관 괴링은 공산당의 추가 쿠데타 계획을 ‘상세히’ 보고했다. 히틀러는 3월5일 선거를 1주일 앞두고, 공산당을 금지하고 반대 언론사들을 폐쇄하는 포고령을 마련해 힌덴부르크 대통령의 서명을 받아냈다.

3월5일 총선에, 4000만 명 이상의 독일인이 투표에 참여했다. 이전 어떤 선거보다도 200만 명 이상 많아, 등록 유권자의 근 89%가 참여했다. 이 200만 명표는 대부분 나치당에 돌아갔다. 히틀러가 원했던 나치당 단독 51% 의석수 득표엔 실패했지만, 44%를 확보해 수권법 통과에 필요한 안정적 연정을 구성할 수 있게 됐다.

다음날부터 나치당은 주 정부청사에 난입했고, 주요 관공서에는 나치당의 하켄크로이츠(卍) 깃발이 걸렸다. 수만 명의 정치적 반대파가 ‘보호 구금’에 처해졌고, 주요 정치인들이 해외로 피신했다.

히틀러가 노골적으로 공산당ㆍ사민당ㆍ유대인들에 대해 폭력적 조치를 취하는데도,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침묵했다. 그는 이미 85세의 고령이었고, 정치적 민첩성도 판단력도 떨어졌다. 더 이상의 국가 혼란도 꺼렸다. 힌덴부르크는 요세프 괴벨스를 신설 장관직인 ‘국민계몽ㆍ선전 장관’에 임명하는 칙령에 서명했다. 괴벨스는 그날 일기에 “이 위대한 노인이 우리와 함께 있다는 게 우리 모두에게 얼마나 큰 행운인가”라고 썼다.

공산당을 금지시키고 실시한 1933년 3월 총선에서 크게 승리한 히틀러가 3월21일 포츠담 데이에서 당시 대통령인 힌덴부르크에게 고개를 숙이며 악수하고 있다. '늙은 원수(元帥)'가 오스트리아 시골뜨기 하사 출신의 히틀러의 권력을 인정하는 순간이었다./위키피디아

3월21일 힌덴부르크가 대표하는 기존 엘리트ㆍ군부ㆍ보수 세력과 나치와의 화합을 상징하는 정치 쇼인 포츠담 데이 행사에서 히틀러는 힌덴부르크에게 고개를 숙였다.

이후, 히틀러는 일사천리로 자신의 정치 야망을 진행시켰다. 같은 날, “국가 재건을 위한 투쟁”을 하다가 범죄를 저지른 나치당원들을 사면하는 새 법령이 발표됐다. 반역죄로 유죄 판결을 받은 범죄자들이 하루 아침에 ‘국가 영웅’이 됐다. 그날 오후엔 베를린 북쪽의 낡은 맥주 양조장에 새 강제구금소가 개설됐고, 다음날부터 첫 수감자들이 도착했다.

◇72% 의석 지지로 수권법 제정

3월23일 독일 국회의원들은 방화로 훼손된 의사당 맞은 편의 크롤 오페라 하우소에 모였다. 갈색 나치 돌격대 제복에 하켄크로이츠 완장을 착용한 히틀러가 바이마르 공화국의 실패를 열거하고, 수권법을 제정해 독일의 존엄성ㆍ군사적 동등성을 확보하고, 경제ㆍ사회적 안정을 이뤄야 한다고 연설했다.

스위스 망명에서 돌아온 사민당 대표 오토 벨스는 이 법안이 바이마르 공화국을 약화시키고 증오와 분열을 조장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나치당 의원들은 “지난 13년간 사민당이 고용과 안정, 존엄성을 위해 뭘 했느냐”고 조롱했고, 나머지는 침묵했다.

수권법 제정 투표 결과, 441명이 찬성했다. 히틀러는 재적 의원 72%의 지지를 받았다. 다음날 아침, 프레데릭 새킷 미국 대사는 국무부에 전보를 보냈다. “이 법에 근거해, 히틀러 내각은 사실상 모든 헌법적 제약을 제거하고 전체 정부 체계를 다시 구성할 수 있게 됐다.”

◇괴벨스 “기존 체제의 적을 자처했는데, 1등석 열차와 식사 제공 받아”

그날 국회의원으로 표결에 참석했던 요제프 괴벨스는, 나치당이 헌법적 수단만으로 헌법에 기초한 연방 공화국을 완전히 해체한 사실에 놀라워했다.

괴벨스는 7년 전인 1926년 최초의 나치당 의원 12명 중 한 명으로 라이히스타크(Reichstagㆍ독일의회)에 선출되었을 때도 비슷한 충격을 받았다.

한스 프랑크(나치 돌격대장)과 자신을 포함한 12명이 스스로 ‘바이마르 공화국의 적’을 자처하면서도, 민주주의 절차를 마음대로 방해ㆍ마비시킬 권한을 갖고 의사당에 나란히 앉고, 1등석 열차와 식사를 제공받게 된 사실이었다. 그때 괴벨스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민주주의의 최대 아이러니(joke)는, 민주주의를 파괴하려는 치명적인 적들에게 민주주의가 바로 그 수단을 제공한다는 점이다.”

히틀러는 1934년 8월 힌덴부르크가 죽자 대통령과 총리 직을 겸하는 총통(Führer)이 됐다.

그리고 1935년 3월, 제1차 대전 종전(終戰) 베르사유 조약이 독일군이 주둔할 수 없는 비무장 지역으로 설정한 라인강 서쪽, 프랑스와 벨기에에 접한 라인란트(Rhineland)를 재점령했다. 2차 대전으로 가는 히틀러의 첫 시험대였다. 영국과 프랑스는 군사적으로 대응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