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중남미 마약 카르텔을 상대로 전쟁을 선포했다. 마약 밀매 조직을 ‘외국 테러 단체’로 지정하고, 이들이 탄 선박을 나포하는 대신 격침하는 방식으로 소탕 작전 방침을 바꾸겠다고 밝혔다.
마코 루비오 국무장관은 4일(현지시각) 에콰도르 수도 키토를 방문해 다니엘 노보아 대통령과 회담한 뒤 가진 공동 기자회견에서 “에콰도르 내 마약 조직 ‘로스 초네로스’와 ‘로스 로보스’를 외국 테러 단체(FTO)로 지정한다”고 발표했다. 그는 이들을 “사악한 동물들”이라고 칭하며 강한 적개심을 드러냈다. FTO로 지정되면 미국 내 자산 동결은 물론, 이들과 거래하는 개인이나 단체도 제재를 받게 된다.
이번 조치는 최근 카리브해에서 발생한 마약선 격침 사건 직후 나왔다. 미군은 베네수엘라 기반 범죄조직 ‘트렌 데 아라과’가 운영하는 것으로 의심되는 마약 운반선을 공격해 11명을 사살했다. 루비오 장관은 “기존 차단(interdiction) 작전은 효과가 없다”며 “그들을 막는 방법은 날려버리는(blow them up) 것”이라고 했다.
미국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우방국을 ‘대리인’으로 내세우는 방안을 제시했다. 루비오 장관은 “협력국 정부가 범죄 조직을 찾아내 폭파하는 것을 도울 것”이라며 “그들(협력국)이 직접 공격을 수행할 수도 있고, 우리는 그들을 도울 것”이라고 말했다. 뉴욕타임스(NYT)는 이를 두고 미군이 쓴 격침 작전 방식을 동맹국에 전수하겠다는 의미라고 분석했다. 미국은 이런 기조에 맞춰 에콰도르에 1300만 달러 규모 안보 자금과 600만 달러 상당 해군용 드론을 지원하기로 약속했다. 에콰도르 요청이 있으면 미군 기지를 재설치하는 방안도 검토할 수 있다고 밝혔다.
한때 남미에서 가장 안전한 나라로 꼽혔던 에콰도르는 최근 몇 년 새 멕시코와 콜롬비아 카르텔들이 유입되면서 거대한 범죄 소굴로 변했다. 세계 최대 바나나 수출국이라는 점을 악용, 조직들은 바나나 컨테이너에 코카인을 숨겨 유럽과 미국으로 밀반출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벌어지는 영역 다툼으로 올해 살인 사건 발생률은 작년보다 40% 급증, 남미 최고 수준에 달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미국의 새 접근법이 국제법 위반 소지가 크다고 지적했다. 존스홉킨스대학 벤저민 게단 연구원은 CNN에 “통상적인 방식은 선박을 멈춰 세우고, 승선해 용의자를 체포하고, 마약과 자금을 압수하는 것”이라며 “공중에서 발포해 11명을 사살하는 것은 이례적”이라고 했다. 인근 중남미 국가들 반발도 만만치 않다. 멕시코 외교장관은 루비오 장관과 회견에서 ‘내정 불간섭’과 ‘평화적 갈등 해결’ 원칙을 강조하며 선을 그었다. 클라우디아 셰인바움 멕시코 대통령 역시 미국의 일방적인 군사 개입은 ‘레드라인’이라고 못 박았다. 베네수엘라 정부는 마약선 격침을 두고 “재판 절차도 없는 초법적 살인”이라고 비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