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신년 한국에 필요한, 한국인이 지향해야 할 원칙과 가치는 무엇일까? 빨리, 많이, 크게를 넘어선, 목적으로서의 세계관은 무엇일까? 여러 논의가 있고, 다양한 생각이 있을 듯하다.
‘법(法)의 확립’은 필자가 생각하는 원칙 가치로서의 대한민국의 첫 출발점이다. 법의 확립은 이미 20세기 이전에 끝낸 서방 근대화, 민주주의의 흔적이기도 하다. 과거사로 밀려난, 너무도 당연하기 때문에 잊고 지내는 것이 법의 확립이다. 그러나 2024년 한국을 보면 너무도 절실하다. 법이 한순간 무너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저런 이유와 핑계로 법망을 빠져나가는 인간과 세력들이 넘친다. 법 앞에서 오히려 큰소리를 치고, 법 자체를 타도 대상으로 여기는 불온한 공기가 넘실댄다. 1억원짜리 개(犬)복제도 이뤄지고, 1만 달러짜리 명품가방이 넘치는, 평화와 번영의 나라가 한국이다. 그러나 아예 내로남불 법을 통해 혁명 전야 카오스 세상으로 몰아가려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
타임 캡슐 팔레르모
2023년 크리스마스 직전 이탈리아에 ‘잠시’ 들렀다. 20여 년 친구의 아버지가 9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아직도 기억하지만, 친구의 아버지는 남자의 삶을 바다에 비유해 풀어나갔다.
“프랑스는 바다를 여성명사로 받아들이면서, 바다=여성으로 해석한다. 정신 나간 멍청한 생각이다. 시칠리아에서 바다는 남성명사다. 따라서 바다=남성이다. 태풍, 폭우, 쓰나미가 밀려와도 남성이라면 친구로 받아들일 것이다. 바다는 연인이 아니라 친구다.”
장례식은 친구의 집이 있는 시칠리아 팔레르모에서 거행됐다. 때 마침 연말 한정 최저가 비행기 티켓을 구할 수 있었다. 인도 뭄바이에 머물던 중, 일사천리로 결정해 왕복 6일 일정으로 시칠리아를 다녀왔다.
장례 예배는 팔레르모 한복판 산 도미니크 교회(Church of Saint Dominic)에서 치러졌다. 장례와 묘지 비용이 거의 들지 않는 곳이 이탈리아다. 평소에 죽음을 생각하며 교회와 관할 커뮤니티를 통해 미리 대비한다고 한다. 일찍 준비한 덕분인지, 예배에 참석한 가족들을 봐도 슬픔의 그림자가 거의 없다.
시칠리아에 머무는 동안 팔레르모와 주변 산보에 나섰다. 팔레르모는 진짜 이탈리아의 모습을 간직한 거대한 문화유산이다. 19세기 당시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타임 슬립(Time Slip) 무대다.
글로벌 시대의 결과이지만, 이탈리아 대부분은 사실상 ‘플라스틱 도시’로 변했다. 일단 ‘메이드 인 이탈리아’가 극히 드물다. 제대로 된 이탈리아 요리를 즐기려면 돈도 들지만, 도심이 아닌 외곽으로 나가야만 한다.
젊은 이탈리아인들조차 와인을 멀리하고 케밥과 태국 요리에 열광하는 시대다.
육지에서 떨어진 시칠리아는 이 같은 추락에서 벗어나 있다. 음식도 그대로이고, 가격도 적당하다. 로컬 와인이 한 잔이 아닌 한 병에 1유로(1450원)다. 관광객이 몰리는 팔레르모 중심부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100년 전, 아니 500년 전 시칠리아 얼굴과 멋 그리고 맛을 만날 수 있다.
‘聖人’이 된 검사
시칠리아라고 하면 마피아부터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시칠리아 전체를 통틀어 마피아의 총본부 같은 곳이 팔레르모다. 장례식이 끝난 뒤 친구와 식사를 하던 중 흥미로운 얘기를 들었다.
“아버지 장례식이 치러진 산 도미니크 교회는 반(反)마피아 운동의 성지(聖地)다. 마피아에 반대하고, 마피아와의 검은 관계를 끊으려는 사람이라면 일단 산 도미니크부터 들른다.”
친구의 설명과 함께 귀에 익숙한 이름 하나가 들렸다. 이탈리아, 아니 세계를 대표하는 법의 화신(化神), 조반니 팔코네(Giovanni Falcone·1939~1992년)란 인물이다. 산 도미니크 안에 팔코네 묘지가 있다고 한다.
마피아에 관심이 있다면 조반니 팔코네란 이름을 한 번쯤 들었을 것이다. 영화로도 수차례 만들어졌는데, 마피아 담당 검사로 팔레르모 최대 마약조직을 수사하던 중 암살당한 이탈리아공화국의 영웅이다.
팔코네는 원래 팔레르모 출신으로, 팔레르모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로마에서 마피아 전담 검사로 발탁돼 일하던 1992년 5월 23일, 고향 팔레르모에서 암살된다. 초(超)고성능 원격폭탄에 의한 자동차 폭발 테러였다.
흔적도 없이 통째로 날아갈 당시, 팔코네 부인과 검찰 직원 3명도 동시에 사라졌다. 팔레르모에서 열린 팔코네의 장례식은 국장(國葬) 수준이었다고 한다.
팔코네의 비극은 자동차 테러 57일 뒤인 1992년 7월 19일 재현된다. 팔코네의 동료인 마피아 전담 검사 파올로 볼세리노(Paolo Borsellino)가 팔레르모의 어머니 집에 머물던 중 자동차 폭발 테러로 살해된 것이다. 검찰 직원 4명도 함께 숨진다. 팔레르모 출신 볼세리노는 팔코네의 친구이자 검찰 동료이기도 했다.
두 사건의 주범은 나중에 체포되어 종신형에 처해진 마피아 두목 리나(Riina)였다. 그는 무려 400kg의 폭약을 사건 현장에 설치해 원격 조작으로 살해했다고 한다. 한순간 모든 것을 사라지게 만든 엄청난 테러로, 당시 지진이 난 걸로 오해할 정도였다고 한다. 두 사람은 거의 ‘성인(聖人)’으로 추앙된다.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즉시 교회로 향했다. 산 도미니크 안으로 들어가자 팔코네의 무덤이 보였다. 장례식 때는 놓쳤지만, 정문으로 들어가 성당 오른쪽 중간 지점이 팔코네의 무덤이다. 이미 10여 명의 순례객들이 방문해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작은 편지 수십여 통이 팔코네의 대리석 묘비 위에 놓여 있었다. 순례객들이 직접 써서 남긴 편지로, 팔코네를 기리고 존경하는 내용들이었다.
겨울철 교회는 차갑고도 쓸쓸하다. 하얀 대리석이 내뿜는 냉기(冷氣)와 함께, 귀적(鬼籍)에 오른 사람들의 싸늘한 영혼이 표류하기 때문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팔코네의 무덤 주변은 설명할 수 없는 온기로 채워진 듯하다.
순례객들은 조문(弔問) 이후, 약속이나 한 듯 무덤 정반대 편 채플 쪽으로 이동했다. 궁금해서 따라가 봤다. 팔코네 정반대 편 채플을 지키는 무덤의 주인공은 주세페 풀이시(Giuseppe Puglisi)라는 이름의 교회 신부였다. 1937년 팔레르모에서 태어난 그도 가톨릭 교회가 성인으로 추앙한 인물이라는 설명이 새겨져 있다. 풀이시는 교회 보수공사를 핑계로 돈을 뜯으려던 동네 마피아의 요구를 시종일관 거절했다고 한다. 마피아 암살범이 나타난 것은 팔코네 암살 사건 16개월 뒤인 1993년 9월 15일이다.
풀이시가 죽은 날은 그의 57번째 생일이기도 했다. 2012년 베네딕토 교황은 ‘순교자’로 선언하고 복자(福者)품에 올렸다.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총을 겨누는 암살범에게 던진 풀이시의 마지막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