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 산하 기관인 유엔 팔레스타인 난민구호기구(UNRWA) 직원들이 지난해 10월 7일 팔레스타인 무장 세력 하마스의 이스라엘 공격에 적극 가담한 사실이 29일 미 언론 보도를 통해 전해져 충격을 주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무장 단체 하마스의 전쟁 발발 뒤 전쟁터에서 신음하는 주민들을 보살펴 온 유엔 팔레스타인 난민 기구(UNRWA) 일부 직원이 하마스의 이스라엘 공격에 가담한 정황이 뚜렷해지면서 파문이 확산하고 있다. 레바논·예멘 등 주변국으로 전선이 확대되고 있는 이번 전쟁의 발화점이 된 지난해 10월 7일 하마스의 이스라엘 기습 당시 UNRWA 직원 일부가 하마스 깃발 아래 이스라엘로 직접 쳐들어가 민간인을 납치했다는 것이다. 이 같은 정황을 자세히 담은 이스라엘 정보 당국 보고서 내용이 알려지면서 서방 주요국이 잇따라 UNRWA에 대한 지원금을 끊는 등 후폭풍이 거세다. 팔레스타인 주민 권익을 강조하며 이스라엘과 갈등을 빚어온 유엔 수뇌부도 곤혹스러운 상황에 처했다.

뉴욕타임스와 월스트리트저널 등 미국 주요 언론들은 29일 UNRWA 직원들의 하마스 가담 정황을 구체적으로 담은 이스라엘 정보 보고서의 내용을 보도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이스라엘 공격 가담 직원은 최소 13명이다. 이 중 10명은 하마스 대원이고, 2명은 또 다른 반이스라엘 이슬람 무장 단체인 팔레스타인 이슬라믹 지하드에 소속됐다. 나머지 1명의 신원은 확인되지 않았다. 이들 대부분은 교사나 사회복지사 등으로 생업을 유지하면서 하마스 활동을 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 가담 직원의 절반(6명)이 직접 무장 대원으로 이스라엘을 습격했고, 2명은 민간인 납치에 가담했다. 나머지 5명도 탄약을 나눠주거나, 하마스에 사살된 이스라엘군 시신을 가자지구로 옮기는 등의 핵심 지원 임무를 맡았다. 이들이 있었던 이스라엘 키부츠(집단농장)에서는 민간인 97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들이 인명 살상에 연루됐다는 정황이 추가로 확인될 경우 파문은 더 커질 것으로 보인다. 이스라엘 정보 당국은 휴대전화 데이터를 추적하고, 체포하거나 사살된 하마스 대원에게서 확보한 문건 등을 통해 행적을 파악했고, 이를 정리한 보고서를 미국 정부와 공유했다.

보고서에 나타난 UNRWA 직원들과 하마스 간의 유대 관계는 일시적인 수준이 아니었다. 소속 직원 1만2000명 중 10%가량은 하마스나 이슬라믹 지하드 등 반이스라엘 무장 단체와 어떤 형태로든 연결돼 있었다. 남자 직원으로 한정할 경우 그 연계 비율은 넷 중 한 명꼴(23%)이었다. 이 기구의 직원 노조 위원장이 하마스 수뇌부로 선출된 사실이 뒤늦게 밝혀지면서 2017년 해고되는 일까지 벌어졌다.

이스라엘 건국 이듬해인 1949년 12월 유엔총회 결의로 설립된 UNRWA는 직원 대부분이 팔레스타인 주민이며, 유엔의 다른 상위 기구에 예속되지 않고 독자적으로 활동해 왔다.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발발 이후에는 소셜미디어 등을 통해 이스라엘 공습에 따른 민간인 사망 소식 등을 신속하게 알려오며 이스라엘 정부와 대립각을 세웠다. 이스라엘은 오랫동안 UNRWA가 하마스와 연계돼 있다고 주장해 왔다.

그래픽=김하경

상황은 팔레스타인에 불리하게 전개되고 있다. UNRWA에 거액을 지원하던 미국·독일·영국·이탈리아·일본·캐나다·핀란드·스위스 등 20여 국이 진상이 파악될 때까지 지원을 중단한다고 선언했다. UNRWA의 연간 예산은 16억달러(약 2조1300억원)다. 후원이 중단될 경우 구호 활동이 차질을 빚는 것은 물론 직원들의 밥줄까지 끊긴다. 지난해 UNRWA에 175만달러(약 23억3000만원)를 지원한 한국도 상황을 주시하며 지원 지속 여부를 결정할 예정이다.

코너에 몰린 유엔은 바짝 엎드리는 모양새다. 앞서 의혹이 처음 제기된 27일 필리프 라차리니 UNRWA 사무총장은 “지체 없이 진실을 규명하고자 해당 직원들을 해고하고 조사에 착수했다”며 “테러 행위에 연루된 모든 직원은 형사 기소를 포함해 책임을 질 것”이라고 밝혔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지원국들 마음 돌리기에 나섰다. 그는 한국을 포함한 주요 지원국 및 국제기구 관계자들을 만나 이번 사태를 설명하면서 기부금 중단 철회를 요청할 예정이다. 앞서 구테흐스는 28일 “직원들의 혐오스러운 행위는 반드시 심판받을 것”이라면서도 “가장 위험한 상황에서 일하는 남녀 수만 명이 벌을 받아서는 안 된다”며 회원국들이 마음을 돌릴 것을 읍소했다.

이번 사태로 유엔의 방만한 운영과 허술한 관리 감독 체제를 향한 비판 여론도 커질 수 있다. 올해 유엔 예산은 35억9000만달러(약 4조7800억원)에 달한다. 유엔 예산은 자체 수익금으로 마련하지 않고 대부분을 회원국이 내는 분담금에 기반을 두기 때문에 수십 년간 ‘방만 경영’에 대한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국제사회가 선의로 모은 정성이 ‘눈먼 돈’이 돼 민간인 살상에 충당되고 있다”는 비판 여론이 형성될 경우, 유엔 시스템을 전반적으로 바꿔야 한다는 ‘개조론’이 힘을 받을 수 있다.

미국 대선에 이번 파문의 불똥이 튈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공화당 후보 지명이 유력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재임 중이던 2018년 “이 기구의 임무가 근본적으로 잘못됐다”며 자금 지원을 중단했다. 반면 조 바이든 대통령은 취임한 해인 2021년에 지원을 재개했다. 당장 트럼프 캠프는 쟁점화에 나섰다. 마이클 매콜 공화당 하원 의원은 29일 폭스뉴스에 나와 “트럼프 전 행정부에서 이 기구에 대한 자금 지원을 모두 삭감한 이유가 바로 이런 것 때문”이라며 바이든 행정부를 겨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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