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자지구 주민들은 안전을 위해 남부로 이동하십시오. 지금부터 오후 1시까지 남쪽으로 향하는 두 개 대로(大路)로 이동하는 주민들의 안전을 보장하겠습니다.”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의 이슬람 무장 단체 하마스의 지난 7일(현지 시각) 이스라엘 공습으로 전쟁이 발발한 지 한 주가 넘어간 15일, 이스라엘 방송은 대대적 지상군 투입을 앞두고 가자지구 주민들에게 남부로 이동할 것을 권한다는 이스라엘 방위군(IDF) 당국자의 발표를 반복적으로 내보냈다. 하마스가 이스라엘에서 납치한 민간인 등 150여 명이 가자지구에 인질로 잡혀 생사 확인도 되지 않는 가운데 이스라엘은 하마스의 절멸(絶滅)을 천명하며 대대적인 반격에 돌입했다.
이스라엘은 가자지구에 폭격을 이어가면서 가자지구 국경 인근에 군인 수만 명을 집결시키고 지상군 투입에 들어갈 준비를 마쳤다고 예고한 상태다. 가자지구 북동쪽인 수도 텔아비브 인근에선 장갑차 수십 대와 아파치 롱보우 등 공격 헬기가 줄지어 남부로 이동하고 있다. IDF는 위험 지대에 사는 110만명 주민들에게 신속히 대피하라고 공지하고 있지만 갈 곳이 마땅치 않은 다수의 주민은 무턱대고 거주지를 떠나길 꺼리며 집에 머무는 상황이다.
주민들이 남아 있는 상황에 지상군 투입으로 하마스와 IDF 사이에 격렬한 교전이 발생할 경우 막대한 민간인 사상자가 나올 가능성이 크다. 유엔 등 국제사회가 이런 비극을 우려하고 있지만 전기와 인터넷이 끊긴 가자지구의 주민들에게 이스라엘의 대피 권고는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고 있다. 하마스가 주민들에게 “대피는 곧 이스라엘군에게 진격로를 내주는 것”이라며 피란을 막는 것도 문제다. 한 가자지구 주민은 이코노미스트에 “전기와 함께 방송도 끊겼고, 냉장고 음식은 썩어 문드러져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비참함만이 가자지구를 뒤덮고 있다. IDF는 무작위로 주민들에게 전화를 걸어 대피를 권고하지만 그 전화의 진위를 파악할 방법조차 없어 가족과 함께 집에 머무는 쪽을 선택하는 주민이 대부분”이라고 했다.
‘이스라엘 궤멸’이란 목적을 위해서라면 민간인 목숨의 희생도 불사하는 하마스는 이스라엘 공습 때 납치한 150여 명의 인질과 함께 가자지구의 주민까지 ‘인간 방패’로 내세우려 하고 있다. 하마스가 이들을 무장대원들 사이에 섞어놓거나, 반대로 하마스가 민간인으로 위장한다면 이스라엘군이 이를 구분하기는 매우 어려워진다. 이 상태로 지상군이 투입될 경우 민간인 피해가 불어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가자지구 주민은 230만명, 하마스 대원은 3만명으로 추정된다. 하마스가 가자지구 안에 파놓은 땅굴과 그 속에 설치한 함정도 이스라엘군의 걸림돌이 될 전망이다. 익명의 하마스 관계자는 뉴욕타임스(NYT)에 “가자지구 북부 여기저기 있는 터널에서 갑자기 튀어나와 이스라엘군을 뒤에서 공격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앞서 이스라엘은 하마스의 기습 공격과 민간인 사살·납치 등에 대한 보복 조치로 그간 인도적 차원에서 가자지구에 지원했던 전기·식량·연료 공급을 모두 막았다. 국경은 완전 봉쇄해 가자지구로 구호 물품이 들어갈 수도 없는 상황이다. 이후 이스라엘은 한 주 사이 가자지구에 대해 6000건 넘는 폭격을 가하며 하마스의 악랄한 테러에 대한 보복에 나섰다. AP는 “이스라엘의 공격으로 가자지구 내의 많은 도로가 손상되고 통행도 어려운 상태”라며 “환자와 거동이 불편한 이들은 단기간에 대피할 수 없고 대피소와 차량, 연료가 부족해 피란 역시도 쉽지 않다”고 전했다.
이스라엘은 당초 하마스가 밀집한 가자시티 등 가자지구 북부에 거주하는 주민에 대한 대피 시한을 14일 오후로 정했다가 주민들의 이동이 더디자 이를 15일 오후로 다시 연기했다. 가자지구를 떠나기로 한 수만 명의 피란민은 버스나 당나귀 수레 등에 집기를 싣고 남쪽으로 이동 중이다. 하지만 이들은 그곳에서 어디에 머물러야 할지, 남쪽으로 가면 생존이 보장되는지 그 무엇도 알지 못하는 상태다. 이미 물조차 부족한 병원의 환자들은 이동할 엄두도 내지 못한다. NYT는 “팔레스타인 적신월사가 운영하는 가자시티의 알쿠드스 병원은 이스라엘군의 대피령에 따르지 않기로 정했다. 중환자실의 환자와 인큐베이터에 있는 아기,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부상당한 환자를 대피시킬 수단은 없다”고 전했다.
가자지구는 부산의 절반 정도인 365㎢ 면적에 230만명이 모여 사는, 인구 밀도가 세계에서 가장 높은 지역 중 하나다. 그나마 거주할 건물이 있는 도시인 가자시티엔 집 하나에 가족 30명가량이 함께 생활하는 경우도 많다. 한 가자지구 주민은 “많은 주민이 이스라엘의 폭격과 하마스의 위협에 동시에 처할 수 있는 피란길에 나서기보다는 가족과 함께 건물 안에 머무는 편이 안전하다고 여긴다”고 이코노미스트에 말했다. NYT는 “가자지구의 정수장과 공공 수도망이 연료 부족으로 가동을 중단하면서 깨끗한 물이 부족한 상황”이라며 “주민들이 우물에서 더러운 물을 마시는 실정이라 수인성 질병이 번질 위험이 크다”고 전했다.
가자지구를 벗어나 남쪽으로 향하는 주민 중 일부는 국경을 넘어 이집트로 가고 싶어하지만 방법이 없는 상황이다. 이집트로 이어지는 유일한 관문인 ‘라파 통로’가 폐쇄됐기 때문이다. 가자지구 남부 도시 라파와 이집트를 잇는 라파 통로는 그나마 가자지구 민간인을 위한 구호 물품이 들어갈 수 있는 ‘생명줄’ 역할을 할 수 있다. 하지만 팔레스타인 난민이 대거 유입되는 것을 꺼리는 이집트는 군사력을 증강 배치하고 임시 시멘트 장벽까지 설치하며 국경 통제를 오히려 강화했다.
국제사회는 이스라엘에 지상군 투입을 적극 만류하고 나섰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13일 NYT 기고문을 통해 “극히 짧은 시간에 대규모 대피를 명령하는 것은 인도주의적으로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며 “(급작스러운) 대피령을 다시 생각해달라”고 호소했다. 앞서 유엔은 “인도주의적 조치 없이 이같이 큰 규모의 이동은 불가능하다”고 밝혔다.
한편 지난 7일 시작된 양측의 무력 충돌로 사망자는 3600명을 넘어섰다. 유엔 인도주의업무조정국(OCHA)은 이스라엘 군 당국의 발표를 인용해 이스라엘 측 사망자가 1300명, 부상자는 3436명(15일 오전 기준)이라고 집계했다. 같은 날 가자지구 보건부는 가자지구에서 최소 2329명이 숨지고 부상자는 9042명에 달한다고 밝혔다.
지상전 돌입을 둘러싸고 양측의 힘겨루기가 이어지면서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이 중동으로 확전될 조짐도 보이고 있다. 호세인 아미르압돌라히안 이란 외무장관은 13일 유엔의 중동 특사 토르 벤네슬란드를 만나 “이란에는 ‘레드라인(양보할 수 없는 선)’이 있으며, 이스라엘의 군사 작전이 계속되고 특히 지상전을 실행한다면 이란도 이에 대응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가자지구는 어떤 곳
지중해에 면한 중동의 요충지로 고대 그리스·로마·아랍·오스만튀르크 등의 지배를 거쳤다. 20세기 들어서도 이스라엘과 아랍 사이 중동 전쟁의 격전지였다. 1987년 1차 인티파다(팔레스타인 민중 봉기)의 발원이며, 오슬로 평화협정 체결을 계기로 1994년 5월부터 팔레스타인 아랍인 자치가 시작됐다. 2007년부터 가자지구는 무장단체 하마스가, 요르단강 서안지구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분점 통치하는 구도가 확립돼 지금에 이른다. 이스라엘과 하마스가 이곳에서 3차례(2008·2012·2014년) 전쟁을 했고, 2021년 5월에도 무력 충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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