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런던 BBC방송국 전경. /로이터 뉴스1

영국 공영방송 BBC의 리처드 샤프 회장이 28일(현지 시각) 전격 사임을 발표했다. 그가 지난 2020년 말 BBC 회장직에 지원하면서 당시 보리스 존슨 총리에게 80만파운드(약 13억원)의 대출을 알선해 준 사실을 공개하지 않았다는 게 이유다. 그의 BBC 회장 취임과 존슨 총리의 대출 알선 간 아무 대가성이 없더라도 이를 스스로 공개하지 않은 것만으로 윤리적 문제가 되고, 이로 인해 BBC의 ‘공정성’마저 의심케 할 수 있다는 엄격한 잣대가 적용됐다.

샤프 회장은 미국 투자은행 골드만삭스에서 23년, JP모건에서 8년간 근무한 금융계 출신으로 영국 보수당과 깊은 인연을 맺어왔다. 존슨 전 총리가 런던 시장 시절 고문 역할을 했고, 2000년대 초 골드만삭스 재직 중엔 리시 수낙 현 총리의 상사이기도 했다. 2000년 이후 지금까지 보수당에 40만파운드(약 6억7000만원)가 넘는 거액의 기부금도 냈다. 그가 BBC 회장직에 임명되자 대번에 “권력 주변인에 대한 정실·보은 인사가 아니냐”는 의혹이 나왔다.

이런 의심은 올해 초 보수 성향 일간지 더타임스가 “샤프 회장이 존슨 전 총리가 거액의 대출을 받는 과정에 개입했다”고 폭로하면서 정부의 공식 조사로 이어졌다. 더타임스는 “샤프 회장이 BBC 회장 공모에 지원키로 한 뒤 존슨 전 총리에게 대출을 도와줄 사람을 소개해 줬고, 그 직후인 2021년 1월 BBC 회장 후보로 지명됐다”고 보도했다. 또 “대가성 여부를 떠나 BBC 회장 인선 과정에서 총리와 이런 금전 관계에 얽힌 것을 숨긴 것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영국 정부가 이날 발표한 외부 조사 보고서는 언론의 지적을 그대로 수용했다. 이 보고서는 “샤프 회장이 당시 총리의 개인 재정 문제를 도왔기 때문에 BBC 회장으로 추천됐으며, 이로 인해 샤프 회장이 존슨 전 총리와 독립적이지 못할 것이라는 인식이 형성될 수 있다”고 밝혔다. BBC의 경영 및 보도 공정성이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의심’만으로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보고서는 또 “BBC 회장 공모 당시 ‘샤프 회장이 내정자’라는 소문이 돌았다”며 “샤프 회장이 자신이 당시 총리에게 대출을 알선해 준 사실을 (회장 공모 과정에서) 미리 공개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잠재적 이해 상충을 초래했다”고 결론 냈다.

샤프 회장은 이에 대해 “(본래 친한 사이인) 존슨 전 총리에게 신용 보증인을 소개해 준 것이 전부”라며 “의도적으로 숨긴 것이 아니라 무심코 밝히지 않은 것”이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내가 이 자리에 계속 있으면 BBC에 피해가 될 것”이라며 사임 의사를 밝혔다. 샤프 회장은 6월 말 정기 이사회 때 물러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