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조토고교 야구부 매니저 나가노 유나가 22일 한신 고시엔 구장에서 내·외야수들의 수비 연습을 돕는 ‘노커’ 역을 수행하고 있다. /NHK

“사무라이 재팬(일본 야구 대표팀)이 WBC 우승을 거머쥔 뒤 약 2시간 지나, 고시엔에서도 새 역사가 쓰였습니다.”(현지 매체 스포츠호치)

지난 22일 오후 2시쯤, 일본 도쿠시마현 조토고교 야구부 여자 매니저 나가노 유나(17)양이 효고현 한신 고시엔 구장에 들어섰다. 흰색 유니폼과 남색 모자, 양말 등 남학생들과 다름없는 차림이었다. 이날은 일본 야구 대표팀이 WBC에서 14년 만에 정상에 오른 날이자, ‘봄 고시엔’으로 불리는 선발고교야구대회가 열린 날. 나가노양은 도쿄 도카이다이스가오고교와의 경기 직전 연습에서 ‘노커(knocker)’ 역할을 수행했다. 노커는 수비 연습을 위해 내·외야수들에게 공을 쳐 주는 역할이다. 한 손엔 야구공을, 한 손엔 배트를 들고 정확한 위치로 공을 쳐 내야 해 운동신경이 요구된다. 대개 팀 코치나 감독이 맡는다. 게다가 일본 고교야구 성지 고시엔 대회에 여학생이 이 역할을 맡아 입성한 것은, 1924년 개장해 100년에 육박하는 구장 역사상 처음이었다.

일본 도쿠시마현 죠토고등학교 야구부원 나가노 유나양이 지난 22일 한신 고시엔 구장에서 내야수들의 수비 연습을 위해 공을 쳐 주는 '노커'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NHK

고시엔 대회는 여학생의 ‘금역(禁域)’으로 여겨져 왔다. 지난 2008년 봄 대회에선 연습에 참가하려던 여학생 입장이 불허됐고, 2016년 노커에게 공을 건네는 보조역을 하려는 여자부원을 대회 관계자가 제지했다. ‘안전’ 때문이란 설명이었다. 하지만 고시엔 대회는 고교생들을 위한 것이지, 남학생만을 위한 게 아니란 비판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에 주최 측은 2017년 대회에서 여학생이 벤치 앞 장비를 치우는 것을 허락했다. 지난해 여름부턴 노커 보조와 파울볼 치우는 일이 가능해졌고, 이번 대회부터 여학생의 노커 역이 정식 허용됐다.

이날 나가노양이 약 2분 동안 노커 역을 수행하고 구장을 나서자, 장내 관중은 힘찬 박수를 보냈다. “멋있다(格好いい·갓코이이)”란 응원 소리도 들렸다. 나가노양은 경기 약 2주 전부터 고시엔 역사를 바꾸는 일을 맡았다는 부담감에 짓눌렸다고 한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의 응원과 격려로 나설 수 있었다”고 했다.

나가노양은 이날 “다들 빛나고 있었다”며, 2대5로 패한 부원들을 격려했다. 그는 “포기하지 않으면 꿈을 이룰 수 있단 걸 실감했다. 여름 대회에서도 또 고시엔 땅을 밟고 싶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