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에센바흐에 있는 이자르2 원전. /로이터 연합뉴스

독일이 올해 말로 예정됐던 ‘탈(脫)원자력 발전’ 계획을 또다시 수정했다. 현재 가동 중인 3개 원전 중 1기를 폐쇄하고, 나머지 2기는 ‘예비용’으로 남겨 놓겠다던 기존 계획을 3기 모두 당분간 정상 가동하는 것으로 급선회했다. 러시아산 천연가스 공급 중단에 따른 올겨울 에너지 부족 사태가 예상보다 심각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철옹성 같던 독일 탈원전 정책이 ‘부분 유턴’했다는 평가가 나오는 가운데, 독일 정치권 일각에서는 “원자력 없이 에너지 안보는 달성하기 힘들다”는 주장이 계속되고 있다.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는 17일(현지 시각) “현재 가동 중인 엠스란트와 이자르 2, 네카베스트하임 2 등 원전 3기를 모두 내년 4월 15일까지 연장 운영하겠다”고 전격 발표했다. 엠스란트 원전은 올해 말 폐쇄하고, 나머지 2기를 내년 4월까지 ‘예비 전력원’으로만 남겨 놓겠다던 지난달 5일의 결정을 뒤집은 것이다. 현재 독일에서 가동 중인 원전은 이 3곳이 전부다. 올해 말까지 모두 가동을 중단할 예정이었으나, 러시아산 천연가스 공급이 끊기면서 올겨울 전력 부족이 예상되자 수차례 일정이 번복됐다. 전체 발전 용량은 4055메가와트(MW) 수준으로, 지난해 기준 독일 전체 발전량의 약 13%를 차지했다.

이날 결정은 숄츠 총리가 직권으로 내렸다. 영국 경제지 파이낸셜타임스는 “숄츠 총리가 원전 문제를 둘러싼 독일 연정 내 교착 상황을 풀기 위해 직접 뛰어든 것”이라고 분석했다. 독일 여당인 사회민주당(SPD)과 녹색당, 자유민주당(FDP) 등 3당은 앞서 지난 16일 원전 가동 연장 문제를 놓고 협상을 벌였으나 합의에 실패했다. FDP와 녹색당의 입장이 평행선을 달렸기 때문이다. FDP는 “현재 가동 중인 원전 3기를 2024년까지 연장 가동하고, 필요하면 이미 폐쇄한 원전도 재가동해야 한다”는 입장이고, 녹색당은 “국민과 당원에게 약속한 탈원전 일정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맞섰다.

이자르 2. /위키피디아
독일 원전 현황.

원전 가동 연장 문제는 겨울이 불과 한 달 앞으로 다가오면서 급부상했다. 독일 정부는 9월 초까지만 해도 “원전 가동 연장은 불필요하다”는 입장이었다. 올겨울 전력 수요 예상치를 바탕으로 한 ‘전력망 스트레스 테스트’ 결과, 전력 예비율이 당초 기대보다 높게 나왔다는 것이다. 녹색당 출신인 로베르트 하베크 독일 부총리 겸 경제기후보호부 장관은 “독일은 원전 없이도 올겨울을 잘 넘길 수 있다”고 직접 강조하기도 했다.

그러자 산업계에서 반발과 우려가 쏟아졌다. 독일 경제인연합회 등 기업 단체에서 “올겨울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멀쩡한 원전을 억지로 멈추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다”는 지적이 나왔다. 또 전력 부족으로 정전 사태가 벌어질 경우, 공장들이 대거 멈추면서 제조업 중심인 독일 경제가 치명적 타격을 입는다는 분석도 나왔다. 산업계의 이 같은 반발을 FDP가 적극 대변하고 나섰다. FDP는 하베크 부총리와 녹색당에 “가스와 전력 가격 급등으로 국민들의 불만이 커진 상황에서 자칫 전력 부족 사태가 발생하면 치명적”이라며 원전 가동 연장을 압박했다.

숄츠 총리는 이번 결정에 앞서 “어디까지나 ‘한시적’ 조치”라며 녹색당을 설득한 것으로 알려졌다. 녹색당은 원전 가동 연장 발표 직후 “탈원전 정책 자체가 뒤집힌 것은 아니며, (이번 외에) 더 추가적인 원전 수명 연장은 없다”고 강조했다. 반면 FDP 대표인 크리스티안 린드너 재무장관은 “독일의 국익과 경제를 위해 매우 중요한 결정이 이뤄졌다”며 적극 환영했다. 그는 “특히 엠스란트 원전의 가동 연장은 전력 요금을 낮추고 온실가스 방출을 줄이는 데도 기여할 것”이라며 “FDP는 (원전 가동 연장을 위한) 원자력법 개정 등에 바로 착수하겠다”고 밝혔다.

일간 르 피가로 등 프랑스 매체들은 “독일의 결정이 벨기에와 스페인 등 원전 정책을 고민 중인 다른 나라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전망했다. 독일은 전 세계적으로 가장 급진적인 탈원전 정책을 펼쳐온 나라다. 2000년대 초반부터 탈원전을 시작, 단 10년 만에 가동 원자로 수를 33개에서 17개로 줄였다. 2011년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발생하자 원자로 8기의 가동을 바로 중단하기도 했다. 당시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탈원전 시간표를 10년 이상 앞당겨 2022년 말까지 독일 내 모든 원전을 폐쇄하기로 결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