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국가, 어느 민족이든 한두 명의 ‘국민가수’는 갖고 있다. 이런 가수들은 조건이 있다. 우선 활동하면서 모든 연령대와 성별에 걸쳐 인기가 있어야 한다. 또 사후에도 오랜 세월을 두고 사랑받아야 한다. 영국에는 이런 조건에 부합하는 한 명의 명실상부한 국민가수가 있다. 바로 캐슬린 페리어(Kathleen Ferrier·1912~1953)다. 페리어는 올해로 탄생 110주년, 영면한 지 69년을 맞는다. 하지만 아직도 영국인의 사랑을 받으며 음반이 꾸준히 발간되고 팔리는 ‘현역’ 가수이다.
탄생 110주년임에도 ‘현역’ 가수인 이유
페리어가 한창 활동할 때 그녀의 음악을 사랑했던 세대는 지금 이미 70대 이상이다. 하지만 페리어는 결코 흘러간 옛 노래의 가수가 아니다. 보통 사람들은 자신이 10대 때 먹었던 음식을 평생 찾아 먹으면서 살고, 20대 때 즐겼던 음악을 평생 들으면서 산다. 그러니 페리어는 영국인들에게 아직도 잊힌 가수가 분명 아니다. 단언컨대 영국인들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페리어를 결코 잊지 않으리라 믿는다.
페리어의 목소리는 정말 독특하고 특별나다. 페리어의 목소리에는 영국인들이 그리는 ‘호시절(good old days)’에 대한 향수를 자극하는 애조가 섞여 있다. 그런 그녀의 노래 곡목에는 영국인들이 평소 사랑하는 민요가 많이 들어 있다. 클래식 성악가치고는 클래식을 모르는 일반인들도 페리어를 친근하게 느낀다. 해서 영국인들은 그녀가 정통 오페라에 출연했고 음반도 그쪽이 훨씬 더 많다는 사실을 잊을 정도로 대중적인 가수로 여긴다. 그래서 더욱 사랑을 많이 받는다. 페리어는 콘트랄토(contralto) 가수다. 콘트랄토 가수는 여성의 음역대로서는 소프라노와 메조소프라노 밑에 위치해서 가장 낮은 음성의 창법으로 발성하는 가수이다. 얼핏 들으면 거의 남성 가수 목소리 정도의 낮은 목소리를 낸다. 오페라의 배역도 특정 역으로만 정해져 있어 출연 기회도 적다. 그러다 보니 전공하는 음악도도 적어 콘트랄토 가수는 사실 찾기가 무척 힘들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다수 유명 성악가는 남녀를 불문하고 모두 고성의 소프라노, 테너가 대부분이다.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는 듯한 매끄럽고 높은 음역을 선호하는 세태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현재 영국은 물론 유럽에는 페리어를 잇는 콘트랄토 가수가 드물다. 지휘자로도 유명한 나탈리 쉬투츠만이 거의 유일한 콘트랄토 현역 가수이다. 겨우 메조 소프라노의 자넷 베이커, 마리안느 베아테 키엘란 등이 그나마 저음의 전통을 잇고 있을 뿐이다.
신비한 음색의 여성 콘트랄토
영국 작곡가 헨리 퍼셀과 독일 작곡가 CW 글루크 같은 일부 작곡가들은 남자 배역을 여성 콘트랄토 가수에게 맡기는 곡을 작곡해서 그나마 콘트랄토 가수에게 오페라 주역의 기회를 제공했다. 그러지 않으면 남자의 베이스 가수처럼 콘트랄토는 대개 악녀나 마녀 역이 주어질 뿐이다. 오페라에서 여성 콘트랄토 가수가 남자 역을 할 때는 남장을 하고 나와 노래를 부른다. 바로 페리어가 그런 가수였다. 페리어는 CW 글루크의 오페라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케(Orfeo Ed Euridice)’에서 남장 차림으로 나와 사랑하는 아내를 찾아 지옥을 헤매는 오르페오 역을 낮은 목소리로 소화해냈다. 영국인들은 ‘페리어’ 하면 바로 오르페오를 부르던 그 장면을 연상한다. 페리어는 벤자민 브리튼의 오페라 ‘루크레티아의 능욕(The Rape of Lucretia)’ 전곡을 부르기도 했는데 이 두 곡이 그가 유일하게 부른 전곡 오페라 곡목이다.
필자가 페리어를 처음 접했을 때의 느낌은 충격이었다. 학창시절, 지금도 65년째 현존하는 대구 시내 음악감상실 ‘하이마트(Heimat)’에서 페리어의 음악을 처음 들었다. 당시 필자는 대구 시내 대학생 고전음악 감상 동아리 ‘유터피(Euterpe)’를 통해 음악을 배우고 감상하고 있었다. 어느 날 어두운 조명의 감상실 대형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페리어의 노래는 정말 신비로웠다. 보통은 터져 나온다고 해야 할 정도로 큰 소리가 스피커에서 나오는데, 페리어의 목소리는 흡사 어디 멀리서부터 들리는 애잔한 느낌의 노래 소리였다. 물론 스테레오가 아닌 모노 녹음인 탓도 있었지만 페리어가 지닌 속삭이는 듯한 애조 띤, 그러나 영혼에서 울려 나오는 듯한 낮으나 강한 목소리는 정말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소리였다. 인간이 아닌 요정이 부르는 듯했다. 굳이 비슷한 분위기의 노래를 든다면 지금도 세인들에게 회자되는 일제강점기 비운의 가수 윤심덕과 비슷할까. 특히 윤심덕의 노래 ‘사의 찬미’가 비슷할 듯한데 잘 이해가 될지 모르겠다.
당시 들었던 곡은 거의 클래식 대중가요 같은 것들이었다. 예를 들면 바흐의 나장조 미사곡 ‘하느님의 어린 양’, 마태 수난곡 ‘불쌍히 여기소서’, 헨델의 오페라 로델린다의 ‘네가 힘들어 하고’, 오페라 세르세 중 ‘그리운 나무 그늘이여’,CW 글루크의 오페라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케 중 ‘무엇이 삶인가?’등이었다. 이 중에서 ‘하느님의 어린 양’은 페리어가 오스트리아 빈에서 불렀을 때 천하의 강심장 지휘자 카라얀이 눈물을 흘린 것으로 유명하다.
지휘자 카라얀, 페리어 노래 듣다가 눈물
당시만 해도 이런 곡들을 마리아 칼라스나 엘리자베스 슈바르츠코프, 빅토리아 데 로스 앙헬레스 등 소프라노 목소리로 들을 때였다. 그런데 여성 성악가 중 듣도 보도 못한 목소리를 내는 가수가 있음을 알고는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듯했다. 소프라노만 듣던 당시 필자의 귀에 페리어의 목소리는 거칠고 세련되지 않은 느낌이었으나 곧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소프라노처럼 훈련으로 만들어진 인공의 목소리가 아닌 진정한 인간의 목소리를 드디어 듣는 듯했다. 필자는 원래 저음을 좋아해서 악기도 바이올린보다는 첼로를 훨씬 더 좋아한다. 성악도 소프라노보다는 메조소프라노를 더 좋아하고, 테너보다는 바리톤이나 베이스를 더 좋아한다. 결국 페리어를 운명적으로 좋아하게 될 팔자였던 것 같다.
이후 페리어의 음반을 구하려고 무진 노력을 했으나 결국 한국에서는 구하지 못했다. 당시 한국에는 콘트랄토 가수에 대한 지식이 별로 없어 외제 원판을 취급하는 대구 ‘양키시장’의 전문가게는 물론 서울 남대문시장에도 없었다. 하지만 콘트랄토 가수에 눈을 뜬 덕분인지 콘트랄토와 거의 비슷한 영국 메조소프라노 가수 자넷 베이커를 좋아하게 되었고, 지금은 영국의 신예 캐서린 젠킨스로까지 취향이 넓어졌다.
페리어를 영국인들이 특히 잊지 못하는 이유는 그녀가 본격적인 음악 활동을 시작한 지 겨우 7년 만에, 그것도 가장 절정기에 촛불이 바람에 꺼지듯 요절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나이 41세에 불과했다. 페리어는 엘리트 음악 교육을 제대로 받지 않아 클래식 음악계에서는 거의 흙수저 출신이다. 시골학교 교장과 음악교사를 병행하면서 합창단 활동에 열심이었던 아버지와 콘트랄토 음성을 갖고 있던 어며니에게서 음악 재능을 자연스럽게 물려받았다. 당초 페리어는 성악으로 음악에 눈을 뜨지 않았다. 5살부터 시작한 피아노를 오랫동안 연습해서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다. 어머니가 딸의 피아노 교습에 투자를 아끼지 않아 결국 14살에 최종 그레이드를 딸 정도로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당시 지방에서는 반주자로도 유명했다. 그러다가 자신이 반주하는 성악가들로부터 성악을 한번 해보라는 권유를 받으면서 비로소 노래에 관심을 갖게 되어 성악 지도를 받기 시작했다.
정규 교육 받지 못한 흙수저
이때 화장실에서 하도 노래를 많이 불러서 가족들이 고통스러워했다는 일화도 있다. 학교에서 배운 이탈리아어와 독일어가 그녀의 음악 곡목 리스트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본인이 말한 적이 있다. 그러나 페리어는 형편상 학교를 일찍 떠나야 했다. 캐나다에 있던 오빠를 지원하기 위해서는 페리어의 음악학교 진학은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었다. 결국 14살에 전화교환수 견습이 되었다. 2년 뒤 진급해서 정규직이 된 후 저녁 시간에 그나마 피아노 연습을 계속할 수 있었다. 그렇게 페리어는 전화교환수를 9년간 하면서 재능을 낭비했다. 그러다가 동네 청년 은행원 버트 윌슨을 만나 23살에 결혼한다.
1937년 25살에 시험 삼아 칼라일축제 음악경연대회에 출전한 것이 페리어 인생이 반전하는 계기가 됐다. 남편이 절대 입상을 못 한다고 놀려서 돈내기까지 했지만 페리어는 노래와 피아노에서 모두 우승했다. 거기에 용기를 얻어 본격적으로 노래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27살부터 지방 라디오 방송에서도 공연했다. 전쟁 중에는 군막사, 군수 공장, 군대 병원, 시골동네 등을 돌아다니는 공연단에 초대되어 위문공연을 했다. 29살인 1941년에는 드디어 정식 가수로 계약을 했다.
이때부터 페리어의 음악 일생에 운명의 인물들이 하나둘 나타나 날개를 달아주기 시작한다. 1942년 당시 최고의 영국 지휘자 말콤 사전트 경이 페리어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장래가 열린 가수’라고 고무하면서 영국뿐만 아니라 당시 세계 최고의 공연 에이전트를 소개해 주었다. 경력을 위해서는 런던으로 가야 한다고 권유해서 1942년 12월 24일 런던 함스테드에 방을 얻어 언니와 아버지와 같이 살기 시작했다. 이사 4일 뒤 내셔널갤러리 런치타임 콘서트에 출연해 성공적인 공연을 치렀다.
하지만 페리어는 자신의 목소리에 만족을 못 하고 당시 영국 최고의 바리톤 가수인 로이 핸더슨에게 성악 지도를 요청한다. 핸더슨은 나중에 “그녀의 목구멍 뒤쪽의 크기는 사과를 하나 던져넣으면 걸리지 않고 들어갈 정도로 비정상적으로 컸다”고 했다. 핸더슨은 또 “신체적인 특성만이 페리어의 음악을 완성시킨 것이 아니다. 그녀의 치열한 노력, 예술성, 진지함, 개성 그리고 그 모든 것보다도 그녀의 성격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칭찬했다. 페리어의 어머니 목구멍도 컸다고 하는데 결국 비정상적인 신체 구조가 도움을 준 셈이다.
이렇게 런던 생활을 시작으로 경력이 붙어 레코드 음반도 발간하고 공연도 하게 되었다. 차츰 공연계에도 알려져 1943년 5월 17일 런던 웨스트민스터사원에서 열린 음악회에서 헨델의 메시아 독창으로 런던 무대에 정식 데뷔를 하게 된다. 페리어는 그해 5월 한 달에만 헨델의 메시아를 17번이나 불렀다.
그녀만을 위한 오페라
그때 한창 떠오르는 30살의 신예 작곡가 겸 지휘자 벤자민 브리튼이 청중으로 있으면서 페리어의 가능성을 발견한다. 페리어를 눈여겨본 브리튼은 콘트랄토의 페리어를 타이틀 롤 역으로 염두에 두고 작곡했는데, 바로 2악장으로 이루어진 브리튼의 역작 ‘루크레티아의 능욕’이다. 이 오페라는 바로 런던 근교에서 열린 글라인드본 음악축제에서 1946년 초연된다. 이 공연에서 선보인 페리어의 콘트랄토 음악은 아직도 전설로 남아 있다. 원래 페리어는 오페라 여주인공 역보다는 독창회나 콘서트 등을 더 좋아했고 민요와 가요에 더욱 관심을 쏟았다. 페리어는 오페라 출연 요청을 애써 피하고 있었는데, 브리튼의 설득으로 글라인드본 음악제에서 ‘루크레티아의 능욕’의 주인공 역을 맡게 되면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다.
브리튼은 제대로 된 오페라 전곡 공연 무대경험이 한 번도 없는 가수를 위해 작곡을 하는 모험을 한 셈이었지만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1952년이 되자 페리어의 이름은 영국인 모두가 알 정도로 유명해졌다.
하지만 불행은 항상 행복의 절정에서 시작된다던가. 이즈음 페리어는 유방암이 발병해 수술을 했다. 수술은 성공적인 듯해서 투어를 다시 시작했다. 바로 이때가 페리어의 일생에서 가장 빛나는 시기였다. 투병 중에도 페리어는 브루노 발터, 존 바비롤리 경 등과 협연을 했다. 특히 위대한 지휘자 발터는 페리어 사후에 자신의 생에서 가장 큰 영광은 페리어나 작곡가 말러와 같이 일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페리어를 말러 앞에 둔 것은 페리어가 더 중요하다는 의미였다.
수술에도 불구하고 페리어는 1952년부터 움직임에 제약을 받을 정도로 암이 깊어지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페리어는 공연을 고집했다. 공연 중간에 병원을 다니면서 치료를 다녀야 했다. 그러면서 영국어로 된 글루크의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케’를 존 바비롤리 경과 공연하기 위한 준비도 계속했다. 페리어의 생이 짧다고 해도 영국인은 그녀의 삶이 비극적이라고 여기지 않는 듯하다. 7년 조금 넘는 활동 기간 동안 모든 가수가 평생 해도 못할 업적을 쌓았다는 이유 때문일 것이다. 짧은 기간이긴 하지만 후회 없이 자신을 불태웠다는 뜻이다.
페리어의 마지막 공연은 1953년 2월 런던 코벤트가든 로열오페라하우스에서의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케’ 공연이었다. 2월 3일의 초연은 대성공이었다. 그러나 3일 뒤인 2월 6일 공연 중 2악장 중간에 왼쪽 다리 허벅지 뼈가 부러졌다. 소리가 주변 가수들에게까지 들릴 정도였다. 고통에 얼굴을 찡그린 페리어를 옆에서 보던 남자 가수가 다가가 자신에게 기대라고 해서 페리어는 공연이 끝날 때까지 어딘가에 기대거나 앉거나 하면서 열창을 했다. 커튼이 내린 뒤 앙코르도 다 받고 나서야 쓰러져 들것에 실려 병원으로 갔다. 그때도 극장을 가득 채운 청중들은 아무런 눈치를 못 챘다. 결국 페리어는 8개월 뒤인 1953년 10월 8일 41세의 나이로 영면했다.
영국인들은 누구나 그녀와 연결돼 있다
암투병 사실을 전혀 모르던 영국인들은 엄청난 충격에 빠졌다. 특히 암투병 중에도 태연히 공연을 소화해 내던 페리어의 투혼에 모두 감동했다. 페리어가 남긴 유산은 1만5134파운드에 불과했는데 이를 현재 가치로 따지면 50만파운드(약 8억원)에도 못 미칠 정도이다. 세계적인 가수로 치면 정말 적은 금액이다.
영국의 한 언론은 10년 전인 2012년 페리어 탄생 100주년 특집 기사에서 “한 인간을 이렇게 신비스럽게 기억해도 된다면 단 페리어만이 그 자격을 가지고 있다”고 칭송했다. 아직도 영국인들은 페리어의 목소리를 ‘영혼이 묻어나는 고귀한 음성’ ‘거친 듯 달콤한 진정한 인간의 목소리’ ‘노스탤지어를 자극하는 멀리서 들리는 듯한 모노 음색’ 등으로 기억한다. 유난히 달콤한 인상의 얼굴 때문인지 영국인들은 페리어를 프리마돈나라기보다는 달콤하고 친절한 이웃집 소녀의 이미지로 기억해서 그녀의 요절을 애잔해한다.
영국인 누구에게나 페리어의 목소리는 자신의 뭔가로 연결되고 과거에 그녀의 노래를 들었던 어떤 순간을 떠올리게 하는 신비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들 얘기한다. 그 순간이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슬펐던 순간인지 가장 기뻤던 순간인지를 떠나서 말이다. 영국인들은 “우리는 어떻게든 그녀와 연결된다고 느낀다(Peoples could somehow connect with her)”라는 말까지 한다. 이런 국민가수를 한 명이라도 가진 영국인들은 진정 행복한 사람들일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