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교황이 24일(현지시각) 캐나다 앨버타주 에드먼튼 국제공항에 내려, 캐나다 원주민 대표단의 환영을 받고 있다. 원주민 기숙학교 참사의 생존자이자 '개구리호수 선주민족'의 알마 데자를리스가 인사하자 교황이 휠체어에 앉은 채 그의 손등에 입을 맞추는 모습. /로이터 연합뉴스

“이번 방문은, 참회의 순례입니다.”

가톨릭 교회 수장인 프란치스코(86) 교황이 약 100 년 전에 발생한 대규모의 원주민 아동 학살을 사죄하기 위해 24일(현지 시각) 캐나다를 방문했다. 교황은 이탈리아 로마 피우미치노 공항에서 전용기에 탑승하기 전 이번 방문 목적을 묻는 취재진에게 “참회와 속죄의 순례(penitential pilgrimage)”라고 말했다.

교황은 만성 신경통으로 무릎과 허리 등 건강 상태가 좋지 않다. 지난해에는 결장 협착증 수술을 받기 위해 약 10일간 입원하기도 했다. 지난달 레바논, 이달 초 콩고민주공화국, 남수단을 방문하려 했지만, 모두 무릎 통증으로 취소했다. 교황청 안팎에선 그의 생전 퇴임설까지 나오고 있다. 하지만 그는 “(원주민 아동 학살 사건이 벌어졌던) 캐나다만은 어떤 일이 있어도 예정대로 가야 한다”고 고집했다고 한다.

교황이 이날 오후 캐나다 앨버타주 공항에 도착하자 항공기용 구급 리프트가 그가 탄 휠체어를 통째로 들어 내렸다. 교황은 환영식장까지 자동차와 휠체어를 이용했다. 잠시 의자에 앉을 때도 여러 사람의 부축을 받아야 했다. 그러면서도 창백한 얼굴로 원주민 전통 음악 연주에 귀를 기울이고, 대표단과 환한 얼굴로 악수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24일 캐나다를 방문해 공항에 영접나온 원주민 대표단과 인사하고 있다. 그는 무릎이 안 좋아 휠체어를 타고, 의자에 앉을 때도 부축을 받아야 했다. /AFP 연합뉴스

지난해 캐나다에선 브리티시컬럼비아주, 서스캐처원주 등의 원주민 기숙 학교 터 4곳에서 3~16세 원주민 아동 유해가 1200구 넘게 발견돼 큰 충격을 줬다. 이들 기숙학교는 1881년부터 1996년까지 캐나다 정부가 인디언과 이누이트족 등 원주민 문화를 말살하고, 백인·기독교 사회에 동화시키려는 목적으로 세웠다. 그중 70%를 가톨릭교회가 위탁 운영했다.

100년 넘는 기간에 총 15만명의 원주민 어린이가 부모와 강제로 떨어져 전국 139곳의 학교 기숙사에 들어가야 했다. 이곳에선 사제와 교직원 등에 의한 신체적, 정서적, 성적 학대가 만연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구타 등으로 숨진 아이들은 가족에게 알리지도 않고 암매장했다. 지금까지 유해 1200여 구가 발견됐지만, 기숙 학교에 들어갔다가 실종된 아이들은 최대 1만여 명으로 추산된다. 원주민들은 ‘문화적 집단 학살’로 규정한다.

지난 1900년 캐나다 서스캐처원주(州) 성 미셸 원주민 기숙학교의 가톨릭 사제 2명(양 끝 사제복을 입은 남성)이 학생들과 찍은 사진. 최근 이 시기 가톨릭 교회가 원주민 문화 말살에 앞장섰고 이 과정에서 다수의 어린이들이 희생됐음을 보여주는 각종 물증과 증언이 잇따랐다. /EPA 연합뉴스

프란치스코 교황은 25~29일 앨버타주 에드먼턴, 퀘벡주 퀘벡, 누나부트준주(準州) 이칼루이트 등 3개 도시를 찾아 당시 기숙 학교 참사 생존자를 포함한 여러 원주민 대표자를 만난다. 교회가 원주민에게 저지른 잘못을 사과하고, 원주민 고유 문화와 전통에 대한 존중을 표할 예정이다. 2000년 교회 역사상 교황이 특정 국가나 민족 과거사에 대한 교회의 잘못을 인정하고 현장까지 찾은 것은 전례를 찾기 힘든 일이다. AP통신은 “역사적 방문”이라고 평가했다. 건강 때문에 프란치스코 교황은 하루 1~2개의 공개 일정만 소화할 예정이다. 휠체어를 타거나 지팡이를 짚고 간신히 서 있는 모습밖에 보여줄 수 없을 전망이다.

캐나다 앨버타주 에드먼튼의 주민들이 지난달 31일(현지시간) 브리티시컬럼비아주 캠루프스에 있는 옛 원주민 기숙학교 부지에서 대거 유해로 발견된 어린이들을 추모하는 행사에 모여 신발을 놓아두고 있다. 지난해 캐나다 각지의 원주민 기숙사 부지에선 총 1200구의 아동 유해가 쏟아져나왔다. /AP 연합뉴스

캐나다 기숙 학교의 원주민 아동 학살 참사는 20년 넘게 논란이었다. 캐나다 정부는 2008년 원주민 단체에 공식 사과하고 400억 캐나다달러(약 40조6000억원) 규모의 배상을 했다. 기숙사 운영에 가담한 개신교 교회도 유감을 표했다. 하지만 정작 가장 큰 책임이 있는 가톨릭교회는 사과를 거부해왔다.

지난해 원주민 아동 유해가 쏟아져나오자 프란치스코 교황이 “매우 고통스럽다”는 심경을 밝히며 분위기가 바뀌었다. 교황은 지난 4월 바티칸을 찾아온 캐나다 원주민 대표단에 “깊은 슬픔과 수치를 느낀다”고 공식 사과했다. 반드시 현장을 찾겠다고 약속했다.

가톨릭 인구가 38%에 달하는 캐나다에선 이번 교황 방문에 큰 지지를 보내는 이가 많다. 반면 참사 피해자 유족이나 생존자들은 “이제 와서 교황이 말로만 사과하는 게 무슨 소용이 있느냐”며 냉담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고 로이터통신은 전했다. 원주민 단체는 교회 차원의 배상과 보상, 살아있는 가해자들에 대한 단죄, 훔쳐간 원주민 유물 반환, 기숙 학교 관련 모든 정보 공개 등을 요구하고 있다.

지난 24일 캐나다 에드먼턴 국제공항에서 열린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문 환영식에서 원주민들이 전통 음악 공연을 하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교황청에 따르면 세계 가톨릭 신자는 13억6000만명이며 그 중 절반에 가까운 48%가 아메리카 대륙에 산다. 다른 종교에 비하면 신자 수 감소세가 덜하지만, 프란치스코 교황은 가톨릭교회 쇄신과 저변 확대에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는 지난 4일 로이터 인터뷰에서 “캐나다 방문 뒤 평화 정착을 위해 러시아 모스크바와 우크라이나 키이우를 방문하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