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로이터 연합뉴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전면 침공 사흘째이던 지난 26일(현지 시각)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가 우크라이나에 대전차 무기 1000정과 지대공미사일 500기를 제공한다고 전격 발표했다. 우크라이나 전쟁 위기가 고조되는 상황에서도 “인명 살상용 무기를 지원할 계획은 없다”고 줄곧 못 박아왔던 그가 침공이 단행되자 180도 태도를 바꾼 것이다.

독일은 또 네덜란드가 수입해간 자국산 로켓추진수류탄 400정을 우크라이나에 지원하도록 승인했다. 독일은 2차 대전 이후 분쟁 지역에 자국산 무기를 보내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우고 엄격히 관리·감독해왔는데, 이번에 입장을 바꾼 것이다. 숄츠 총리는 이튿날 연설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새 현실을 만들었고 새 현실에는 분명한 대응이 수반돼야 한다”고 말했다. 숄츠는 이날 연간 1000억유로(약 134조5750억원)의 예산을 투입해 국방력을 강화하겠다는 계획도 발표했다.

독일의 행보가 이번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사태에서 크게 주목받고 있다. 독일은 그동안 우크라이나 위기 국면에서도 러시아 천연가스를 수입하는 노르트스트림2 가스관 때문에 대러 강경 입장에 소극적이었다. 여기에 숄츠 총리가 전임 앙겔라 메르켈 총리에 비해 존재감이 크게 떨어지면서 유럽연합(EU) 리더라는 위상과는 거리가 먼 것 아니냐는 비판을 들었다. 하지만 유럽의 안보가 위기에 빠지자 막강한 국력을 바탕으로 국제사회의 거인으로 다시 등장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2월 27일(현지 시각) 독일 베를린 시민들이 독일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규탄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AP 연합뉴스

독일 내 주요 정당들도 하나로 똘똘 뭉치고 있다. 중도 좌파 사회민주당 소속 총리, 연정 파트너 녹색당 소속 외무장관, 보수 야당 기독민주당 출신 EU 집행위원장이 이념과 정파를 넘어 대러 제재에 한목소리를 내고 있다. 서방 언론들은 특히 전통적으로 친러시아 기조가 강했던 사민당 정권이 대러 제재에 팔을 걷어붙이자 ‘역사적인 태세 전환(historic shift)’이라며 놀랍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블룸버그통신은 “독일의 갑작스러운 정책 변화는, 그만큼 숄츠가 푸틴의 무력 침공에 격노했음을 보여준다”고 분석했다. 다니엘라 슈워체르 유럽유라시아오픈소사이어티재단 국장은 뉴욕타임스(NYT)에 “숄츠가 (기존 서방과 러시아 사이에서 보였던) 독일의 입지를 전략적으로 바꿔나가고 있다”고 말했다.

이번 우크라이나 전면 침공을 계기로 독일의 대러시아 정책 기조가 근본적으로 변화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2차 대전 전범·패전국과 승전국이라는 악연으로 엮인 독일과 러시아는 1990년대 초반 통독과 소련 해체라는 격변을 겪으면서 긴밀한 동반자 관계를 유지해왔다. 러시아는 독일의 중요 에너지 공급처 역할을 했고, 독일은 각종 국제 분쟁 등에서 서방과 러시아의 이견을 좁히는 외교 중재자 역할을 맡으며 상부상조했다. 특히 현 정권 직전 사민당 정권의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총리 집권기(1998~2005)에는 슈뢰더와 푸틴의 개인적 친분을 바탕으로 양국이 ‘밀월 관계’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밀착했으며 앙겔라 메르켈의 기민·기사 정권으로 교체된 뒤에도 우호적 기조는 유지됐다. 그러다 지난 2014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크림반도 강제 병합을 계기로 서방의 대러시아 공동 제재가 시작되면서 서서히 관계 변화 조짐이 나타났다.

폴란드 기차역의 우크라 피란민들 - 지난 27일(현지 시각) 폴란드 남동부 프셰미실 지역의 한 기차역에 우크라이나에서 온 피란민들이 가득 모여있다. 지난 24일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뒤 각 도시에서 교전이 계속되면서 우크라이나를 떠나는 시민들이 늘었다. 유엔난민기구는 폴란드, 헝가리, 슬로바키아 등 우크라이나 인접 국가로 출국한 사람이 50만명에 달한다고 밝혔다. /AP 연합뉴스

푸틴의 우크라이나 무력 침공은 2차 대전 패전 뒤 80년 가까이 ‘로 키’로 유지된 독일 대외 군사 정책의 근간까지 바꿀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독일은 통일 후 병력을 꾸준히 감축했고, 해외 군사 분쟁에 개입을 자제한다는 기조를 유지했다. 해외 파병은 비전투 요원을 중심으로 이뤄졌으며, 매년 납부하는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분담금도 회원국들이 공동으로 정한 목표치(2%)를 밑돌았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더 많은 서유럽 국가들이 적극적인 군사 행동에 나설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독일처럼 분쟁 지역에는 군사 지원을 하지 않는다는 기조를 유지해온 스웨덴도 오랜 관행을 깨고 우크라이나 군사 지원에 나서기로 했다. 스웨덴 정부는 우크라이나에 대전차 무기 500정과 헬멧 5000개, 야전 식량 13만5000명분 등을 보내겠다고 27일 발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