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가까운 장기 집권으로 ‘유럽 최후의 독재자’로 불리는 알렉산드로 루카셰노 벨라루스 대통령이 권력 영속화를 목적으로 하는 개헌을 발표한 지 하루 만에 야당 지지자로 보이는 시민이 보안군에게 사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28일(현지시각) 벨라루스 국가보안위원회(KGB)는 수도 민스크의 아파트를 급습하는 과정에서 군인 한 명과 시민 한 명이 총에 맞아 사망했다고 밝혔다. 사망자는 안드레이 젤터(31)로, 미국 펜실베이니아에 본사를 둔 IT 회사의 직원이다.
급습 현장을 담은 영상을 보면 사복을 입은 예닐곱 명의 군인들이 한 아파트의 잠긴 대문을 억지로 따고 들어갔다. 젤터는 방 안에서 이들을 향해 총을 쐈고, 보안군들 역시 권총을 꺼내 들었다. 이 과정에서 보안군 한 명이 피를 흘리며 복도에 쓰러졌다.
KGB는 성명을 통해 “젤터가 아파트 문 여는 것을 거부했고, 무장 저항했다”며 “이 때문에 보안군 한 명이 숨졌다”고 밝혔다. 보복 사격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젤터가 야당 지지자였으며 KGB가 이들을 표적으로 한 활동을 벌이던 중 사고가 일어난 것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됐다. 망명한 벨라루스 야당 지도자는 트위터를 통해 젤터가 벨라루스 민주화 운동을 지지한 미국 시민이라고 주장했다. 대통령 독재에 반대했기 때문에 살해당했다는 것이다. 뉴욕포스트는 “젤터가 다니던 회사의 설립자이자 CEO가 벨라루스 대선을 다시 해야 한다고 공개 서명한 사람 중 한 명”이라고 전했다. 젤터의 장모 역시 지역 언론 매체에 “그는 매우 좋은 사람이고, 훌륭한 사위”라며 “내가 그를 테러리스트라고 생각하느냐? 절대 아니다”라고 말했다.
젤터가 사망한 건 루카셴코 대통령이 정부 주요 부서의 권한을 재분배하고 ‘벨라루스 전(全)인민의회’를 만드는 내용을 담은 개헌안을 발표한 다음 날이다. AP 통신은 “벨라루스에는 이미 의회가 있다”며 “야당에 대한 탄압을 이어왔던 루카셴코 대통령이 야당 세력을 배제한 대의기구를 만들기 위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루카셴코 대통령은 27년째 집권을 이어가고 있다. 지난해 8월 대선에서 루카셴코 대통령이 또다시 압승한 것으로 나타나자 정권의 부정 투표와 개표 조작 등에 항의하는 야권의 저항 시위가 수개월 동안 벌어졌다. 시위 과정에서 당국의 강경 진압으로 3만5000명 이상이 체포됐으며 다수의 야권 지도자들은 외국으로 쫓겨나거나 자진 망명했다. 야권은 루카셴코 대통령 사퇴와 새로운 총선 및 대선 실시를 요구하고 있으나 루카셴코 대통령은 자국 군부와 러시아의 지원을 등에 업고 6기 임기를 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