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일 러시아 수도 모스크바에 위치한 중앙은행 건물에 러시아 국기가 게양된 채 펄럭이고 있다. 사진은 기사와 직접적 관련은 없음. /EPA 연합뉴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고 1년여가 지난 2023년 3월 국제형사재판소(ICC)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게 체포 영장을 발부했다. ICC가 푸틴에게 적용한 핵심 전쟁범죄 혐의는 아이들 납치였다. 러시아 침공 지역에서 우크라이나 어린이와 청소년 최소 수백 명이 러시아군에 납치돼 강제 이주당한 사실이 확인됐다고 영장에 적시하며 푸틴을 총책임자로 지목했다. 실제로 푸틴이 체포되지는 않았지만 러시아의 정상 외교는 크게 위축됐다.

그러나 실제 납치 및 강제 이주 피해자는 영장에 기재된 것보다 훨씬 많은 최소 2000~3000명대이고, 러시아의 거대 국영 에너지 기업 가즈프롬과 로스네프트가 적극 가담해 피해자들에게 ‘친러시아 사상’을 강제 주입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미국 예일대 공공보건대학원은 25일 이 같은 내용이 담긴 보고서 ‘자발적 공범: 가즈프롬과 로스네프트의 우크라이나 아동 이송 및 사상 주입에서의 역할’을 발표했다.

저자들은 공개된 자료와 문서, 소셜미디어 게시물 등을 종합적으로 분석해 전쟁 발발 이래 2025년까지 러시아에 납치돼 강제 이주된 어린이·청소년 숫자를 2158~3183명으로 추정했다. 당초 우크라이나 동부를 점령한 러시아군이 납치와 강제 이주를 주도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거대 국영 에너지 기업인 가즈프롬과 로스네프트가 적극적으로 관여했다고 보고서는 밝혔다.

보고서에 따르면 러시아로 끌려온 피해자들이 수용된 캠프는 최소 6곳으로 확인됐는데, 이 중 세 곳은 가즈프롬·로스네프트의 자회사 또는 노동조합의 소유였다. 피해자들은 주로 러시아가 침공 후 무력 점령한 우크라이나 동부 도네츠크 및 루한스크 출신 아이들로 이뤄졌다고 한다. 캠프에서는 피해자들의 우크라이나인 정체성을 지우고 러시아에 충성심을 갖도록 하는 사상 교육이 행해졌는데, 이 과정에서도 가즈프롬과 로스네프트는 적극적으로 지원했다고 보고서는 밝혔다.

가즈프롬·로스네프트의 자회사·노동조합·관계 기관과 개별 고위 임원을 합쳐 44개의 후원 주체가 확인됐다고 연구진은 전했다. 이들 중 80%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따른 국제 제재를 받지 않은 것으로 조사돼 국제 사회의 제재의 허점도 드러났다. 가즈프롬과 로스네프트는 푸틴의 최측근이 경영을 맡고 있다. 가즈프롬의 경우 푸틴의 최측근 알렉세이 밀러가 최고경영자(CEO)를 맡고 있고, 2007~2008년 총리를 지낸 빅토르 주브코프가 이사회 의장이다. 로스네프트의 CEO인 이고르 세친 역시 부총리를 지내 푸틴과 가깝다.

보고서는 이 같은 행위가 이번 침공보다 훨씬 전인 2008년부터 행해진 것으로 조사됐다고 밝혔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크림반도를 자국에 강제 병합하고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 지역에 친러 세력을 옹립한 이듬해인 2015년에는 최소 15명이 우크라이나에서 강제 이주돼 사상 교육이 진행됐다고 보고서는 밝혔다.

보고서는 “푸틴 정권과 긴밀하게 연결된 가즈프롬·로스네프트 경영진이 우크라이나 아동의 러시아화(化)를 지원했다”며 “이들은 푸틴의 체포 영장에 적시된 행위의 공범”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최근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이란과의 전쟁 여파로 치솟는 유가 안정을 위해 러시아산 원유에 대한 제재를 해제·완화시킨 조치를 언급하면서 “우크라이나 아동들의 러시아화 행위를 도운 이들이 재정적 보상을 받고 있다”고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