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일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의 장례식이 열린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자리는 찰스 3세를 비롯한 영국 왕실 가족이 앉은 남쪽 익랑(翼廊ㆍSouth Transept)의 뒤쪽인 14번째 열이었다.
그러자 전세계 자유 진영의 지도자이자, 영국으로선 “특별한 관계”라고 강조해 온 미국의 대통령을 홀대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 일었다. 당장 도널드 트럼프 전(前) 대통령은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이게 (바이든 집권) 2년 만에 미국에 일어난 일이다. 미국에 대한 존중이 전혀 없다!”며 “정치, 인생과 마찬가지로 부동산에서도 자리가 전부야”라고 비꼬았다.
일부 미 언론은 바이든 대통령 부부가 전용 방탄(防彈)차량인 ‘비스트(Beast)’를 타고 오느라 늦어서 뒷자리를 배정받았다고 추정하기도 했다. 영국 왕실은 이날 오전 11시에 시작하는 장례식을 앞두고 오전 9시35분~9시55분에 미리 도착해 줄 것을 요청했고, 대부분의 국가원수ㆍ총리ㆍ대표들은 대형 리무진 버스에 동승해 미리 도착했다. 그러나 바이든 대통령이 탄 비스트는 오전 9시45분에 주영(駐英) 미 대사관저인 윈필드 하우스를 출발했고, 교통에 막혀 오전 10시7분에야 사원에 도착했다.
다른 외국 정상들보다 12분 늦게 도착한 바이든 대통령이 안내 받은 자리는 14번째 줄 통로 좌석이었고, 질 바이든 여사 옆 안쪽 자리엔 아그나지오 카시스 스위스 대통령이 앉았다. 바이든 대통령 앞에는 안드레이 두다 폴란드 대통령, 뒤로는 페트르 피알라 체코 공화국 총리가 앉았다. 통로 건너편 같은 줄에는 윤석열 대통령 부부가 앉았다.
하지만 바이든이 ‘지각’해서 뒷좌석을 배정 받은 것은 아닌 듯하다. 바이든이 앉는 자리 앞에 놓인 의자의 등판에는 ‘미국’이라고 쓰인 종이가 붙어 있었다. 버킹엄궁 의전실과 영국 외무부가 사전에 작성한 좌석 배치도에 따른 것이라는 얘기다.
바이든 대통령 부부와 윤석열 대통령 부부가 앉은 남쪽 익랑은 영국 왕실과 각국 원수, 귀빈들을 위한 좌석이 배치됐다. 그러나 이곳의 처음 몇 줄은 찰스 3세 왕을 비롯한 영국 왕실의 가족, 귀족, 영국 전현직 총리들이 앉았고, 그 뒤로는 영(英) 연방에서도 영국 왕을 국가 원수로 인정하는 나라들의 영국 총독과 총리들이 앉았다. 한국ㆍ프랑스ㆍ독일ㆍ미국 등의 국가원수는 이 남쪽 익랑에서 그 뒤쪽으로 자리가 배정됐다.
이 탓에, 영국 왕을 국가 원수로 인정하는 호주, 캐나다, 뉴질랜드 총리 등이 모두 바이든 대통령보다 앞줄에 앉았다. 그러나 이들 총리는 다시 영국 왕이 각국에 임명하는 상징적인 영국 총독들에게 좌석 서열이 밀렸다.
한편, 여왕의 관(棺)이 놓인 제단을 사이에 두고, 찰스 3세 왕을 마주 보고 앉은 북쪽 익랑에서는 현존하는 유럽의 최장수 여왕인 덴마크의 마르그레테 2세(82)와 스페인 국왕인 펠리페 6세 부부를 비롯한 유럽의 왕실 대표들이, 그 뒤를 중동 왕족이 차지했다. 나루히토 일왕(日王) 부부는 요르단 국왕 압둘라 2세 부부의 뒷줄인 6열에 앉았다.
그래도, 으레 모든 국제 행사의 중앙에서 주목을 받고, 여느 국가원수와는 달리 ‘예외’가 적용되는 미국 대통령이 뒷자리에 앉은 것은 석연치 않다는 얘기도 있다. 이와 관련, 한 미국 외교관은 더 타임스에 “바이든은 이번 장례식에서 주목을 피했고, 자신이 아니라 영국인들의 행사(Brits’ show)라는 생각을 한다”고 전했다.
좌석 배치에는 특정 국가원수의 기질도 작용한다. 1990년대 주미(駐美) 영국 대사를 지낸 렌윜 경은 더 타임스에 “바이든은 자아가 강한 사람이 아니지만, 그래도 좀 더 앞 좌석을 원했을 것”이라며 “프랑스의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앞자리에 앉지 않으면 신경질적 반응을 내고,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는 좌석에 개의치 않는 타입”이라고 말했다. 결국 버킹엄궁과 영국 외무부로서는 ‘누가 좌석 배치에 가장 열 받을지, 자문(自問)했을 것’이라는 얘기다. 실제로, 마크롱은 바이든보다 앞줄에 앉았다.
그러나 트럼프는 바이든의 좌석을 놓고, 소셜미디어 ‘트루스 소셜(Truth Social)’에 “이게 2년 만에 미국에 일어난 일, 미국에 대한 존중이 전혀 없어! 그러나 우리 대통령에겐 제3세계 지도자들과 알게 되는 좋은 시간이었을 것이다. 내가 대통령이었다면, 나를 그 뒤에 앉히지는 못했지. 우리 나라는 지금보다 훨씬 달랐을 것”이라고 썼다. 이어 다른 게시물에는 “정치, 인생과 마찬가지로 부동산에서도, 장소가 전부야”라고 썼다.
그의 소셜미디어 게재물을 소개한 미국 언론 기사에는 “스위스가 언제부터 제3세계였느냐?” “미국 대통령 부부가 민주적으로 선출된 지도자들과 나란히 앉을 수 있었던 것만도 엄청난 영광” “초청도 못 받은 주제에, 대서양 건너편에 앉아서 무슨 헛소리냐”는 비난 댓글이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