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일 영국 보수당 정부의 새 총리로 취임한 리즈 트러스(47)는 옥스퍼드대에서 철학ㆍ정치학ㆍ경제학(PPE) 복수 전공 학위를 받았다. 마지막까지 총리 경쟁을 한 전(前) 재무장관 출신 하원의원 리시 수낙도 옥스퍼드 PPE 전공자다. 옥스퍼드대 PPE는 경제ㆍ경영, 컴퓨터과학ㆍ철학, 물리학ㆍ철학 등 이 대학의 다른 복수 전공 학위와 마찬가지로, 학교 측이 모집 때부터 ‘세트’로 묶어 제공하는 학위 프로그램이다.
영국의 더 타임스는 지난 7월말 “프랑스의 엘리트 배출 학교인 국립행정학교(ENA)에 비견될 수 있는 옥스퍼드 PPE가 영국의 정계, 언론계를 잡고 있다”고 보도했다. 트러스 총리를 포함해 영국의 역대 총리 56명 중 옥스퍼드 출신은 29명, 케임브리지 출신은 14명이었다. 흔히 두 학교를 ‘옥스브리지’라고 부르지만, 정계 진출 면에선 옥스퍼드가 케임브리지를 크게 앞선다. 1945년 이후 취임한 총리 15명 중에선 12명이 옥스퍼드 출신이었다.
그러나 옥스퍼드 출신 총리들 중에선 PPE 전공자가 이 대학의 다른 학위 전공자들을 압도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1900년 이후 옥스퍼드 PPE 출신은 헤럴드 윌슨ㆍ에드워드 히스ㆍ데이비드 캐머런ㆍ리즈 트러스 등 4명이다. 같은 대학의 고전학(classics)이나 역사학 전공 총리보다 적다.
그런데도, 영국 사회에선 “정계와 언론계는 옥스퍼드 PPE가 지배한다”는 말이 나온다. 그 이유는 1920년 이 학교가 PPE 프로그램을 처음 선보인 이래, 영국 사회에서 엘리트층 진출을 꿈꾸는 많은 학생들이 정치와 경제, 철학을 두루 배울 수 있는 옥스퍼드 PPE 학위를 선택해 보수당과 노동당, 좌우 스펙트럼에 관계없이 정부 요직에 진출했기 때문이다. 정치인 중 선두주자들은 수시로 바뀌는 내각에서 여러 장관직을 맡아 경력을 쌓는데, PPE는 이런 ‘만능 정치인’을 배출하기에 적합하다는 것이다.
옥스퍼드대는 그리스어 고전학, 역사, 철학 등의 교육을 강조해왔다. 그러나 러시아 혁명과 1차 대전의 종식, 높은 실업률 등의 여러 사회 문제에 직면하면서, 대학은 보다 현실적이고 포괄적인 전문 지식을 갖춘 인재 양성의 필요성을 느꼈고, 1920년 11월 처음으로 PPE 학위를 제공했다. 처음엔 PPE에 이공계 학문도 접목하는 방안도 고려했다고 한다.
정계 진출이 가장 많은 옥스퍼드 졸업생 중에서도 PPE 전공자들은 캠퍼스 내 토론 클럽 등을 통해 서로 연결된 자신들만의 성채(城砦)를 쌓아가고, 졸업한 뒤에는 오르기는 힘들고 미끄러지는 순식간이어서 ‘기름칠한 장대(greasy pole)’라고 불리는 경력의 사다리를 오르게 된다.
하지만, ‘그들’만의 엘리트 리그가 과연 영국 사회의 문제에 해답을 찾는데 얼마나 도움이 되겠느냐는 비판도 크다.
2017년 2월 가디언은 흥미로운 분석을 내놓았다. 2015년 5월 영국 총선을 앞두고, 공약집을 발표한 노동당 대표 에드 밀리밴드나, 이를 반박한 보수당의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 공약집을 분석해 보도한 BBC 방송의 정치ㆍ경제ㆍ재정 분야 에디터들이 모두 옥스퍼드 PPE 출신이라는 것이었다.
BBC 웹사이트에 선거 예측 팟캐스트를 한 파이낸셜타임스의 통계전문가, 가디언의 선거 칼럼니스트, 심지어 광범위한 선거 특집을 게재한 더 타임스의 사주 루퍼트 머독도 마찬가지였다. 이 신문은 결과적으로, “다른 민주주의 국가에선 볼 수 없을 정도로, 특정 대학의 특정 전공자들이 영국의 정계를 지배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옥스퍼드 PPE 전공 학생들은 다양한 정치적 이슈를 잘 이해하고 있다는 자신감과, 앞서 정ㆍ관계에 진출한 선배들의 영예로운 전통을 잇는다는 자부심을 갖게 된다. 또 매 학기(연간 3학기) 16건의 에세이를 제출하고 매주 시험을 치르는 고된 학업을 통해, 자신들과 같은 양질의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영국과 세계를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고 한다.
영국의 교육부장관을 지냈던 데이비드 윌레츠는 “영국은 너무 일찍 전문성을 강조하는 교육을 해 왔는데, PPE는 근대 정치사, 케인즈에 이르는 경제학 이론, 철학적 논리를 폭넓게 배우고 한 명의 튜터(칼리지 교수)에게 1,2명이 배우는 강도높은 수업을 통해 제너럴리스트(generalists)트를 배출한다”며 “장관 재직 때, 종종 끝없이 PPE 에세이를 제출해야 했던 학부 시절의 재탕이라는 느낌을 가졌다”고 가디언에 말했다.
그러나 이 옥스퍼드 PPE 출신의 ‘끼리끼리’ 모임은 현실과는 동떨어진 ‘PPE 헛소리’ 정책을 늘어놓다는 비판도 크다. 특히 기득권 세력의 부패ㆍ부정이 폭로되고 엘리트층에 맞서는 포퓰리즘이 대세가 되면서, 옥스퍼드 PPE의 권위도 도전을 받는다. 또 복잡한 사회 이슈가 이렇게 PPE 학부 시절 마감에 쫓겨 에세이를 써 내듯이 해결돼야 하느냐는 반론도 제기된다.
브렉시트를 이끌었던 도미니크 커밍스(옥스퍼드대 역사학)는 “진짜 똑똑하고 정치에 관심이 있다면, PPE 지원은 재고(再考)하라”며 “많은 PPE 출신 정치인들이 엄청난 확신을 갖고 잘못된 아이디어를 과장되게 퍼뜨린다”고 말했다.
하지만 옥스퍼드대가 공개한 가장 최근 자료인 2018년 학년도에도, 학사 프로그램에선 가장 많은 2338명이 PPE에 지원해 12%만이 합격했다. 영국 밖에선, 로즈(Rhodes) 장학생으로 옥스퍼드에서 공부했던 빌 클린턴 전 미 대통령, 베나지르 부토 파키스탄 전 총리, 아웅산 수치 전 미얀마 국가고문, 맬콤 프레이저ㆍ밥 호크 호주 전 총리 등이 옥스퍼드 PPE 출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