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심 총격전으로 시위대와 군경 수천명이 부상하고, 최소한 수십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 카자흐스탄의 유혈 반정부 사태가 진압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 지난 2일 시위가 본격화한 지 닷새 만이다. 카심조마르트 토카예프 카자흐스탄 대통령은 7일(현지 시각) 새벽 정부 주요 인사가 참여한 긴급 대(對) 테러본부 회의를 마친 뒤 “지방 당국이 상황을 통제하면서 전국 모든 지역에서 헌법 질서가 회복됐다”고 선언했다.
카자흐스탄 내무부에 따르면 지금까지 3000여 명의 시위 가담자가 체포되고, 26명이 사살됐다. 옛 대통령 관저와 시청, 공화국 광장, 알마티 공항 등을 점거했던 시위대는 모두 쫓겨났다. 사태 진압에는 6일 카자흐스탄에 긴급 투입된 집단안보조약기구(CSTO) 평화유지군 소속 러시아군 공수부대(스페츠나츠)가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국영 하바르24 TV는 “CSTO 평화유지군이 알마티 시내의 주요 소요 지역에 투입돼 정부 기관과 시민을 보호하고 있다”고 전했다. 러시아가 파견한 병력 규모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카자흐스탄 사태가 빠르게 수습되면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승부수’가 또 한 번 통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그가 지속적으로 추진해온 옛 소련 국가에 대한 개입과 외교적 압박 전략이 과거 소련이 누렸던 지역 패권을 차근차근 복원해 가는 성과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러시아는 2014년 크림 반도 강제 병합을 시작으로, 발트 3국을 제외한 구소련 국가에 본격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2020년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이 전쟁을 벌이자 분쟁 지역인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에 2000명의 ‘평화유지군’을 배치했다. 또 같은 해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대통령의 6연임 부정선거 논란으로 벨라루스에서 수개월간 시위가 이어지자 러시아 공수부대를 보냈다. 최근에는 우크라이나 동부 국경에 러시아군 10만명을 투입해 군사적 긴장을 고조시키고 있고, 벨라루스와 폴란드 간에 난민 월경 사태가 터지면서 유럽연합(EU)과 갈등이 커지자 벨라루스에 핵무기 탑재가 가능한 전략 폭격기를 보내고 합동 군사훈련을 하는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드미트리 트레닌 모스크바 카네기센터 소장은 미국 인터넷 매체 악시오스에 “카자흐스탄에 대한 러시아의 이번 병력 파견은 구소련 인접국의 국내적 위기 상황에 개입한 것”이라며 “이번 사태는 (서방과 등거리 외교를 해온) 카자흐스탄을 확실한 친러 국가로 만들 기회가 될 수 있다”고 했다.
러시아는 이를 위해 존재감이 미미했던 CSTO를 적극 활용했다. CSTO의 평화유지군 파견은 이번이 처음이다. 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2010년 키르기스스탄에 반정부 시위가 발생해 지원을 요청했을 때만 해도 CSTO가 이를 거부했지만, 이번에는 지체 없이 병력을 파견했다”고 보도했다. 러시아가 CSTO를 미국이 주도하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맞서는 기구로 인식시키며, 구소련 국가에 대한 군사적 개입 수단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는 의미다.
카자흐스탄 사태에 러시아 공수부대가 투입되자 미국과 EU는 즉각 “러시아의 주변국에 대한 자주권 침해와 내정 간섭 가능성이 있다”며 우려를 제기했다. 더불어 소련 제국의 영화(榮華)를 되찾기 위한 적극적 개입 전략이 자충수가 될 수 있다는 지적도 제기되고 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푸틴의 전략은 치명적 약점을 내포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러시아가 주변 국가의 독재 체제를 계속 지원하다가 현지의 민주화 요구가 폭발할 경우 러시아의 영향력이 쉽게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이다.
프랑스24 TV는 “카자흐스탄의 일부 시위대가 ‘노인은 물러나라’는 구호를 외쳤다”고 보도했다. 이는 실권자인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82) 초대 대통령을 겨냥한 것이다. 그는 소련이 붕괴한 1990년부터 2019년까지 햇수로 30년간 대통령을 지내고, 지금도 국가안보회의 의장으로 ‘상왕 정치’를 하고 있다. 이번 사태로 나자르바예프를 밀어내고, 친러파인 토카예프 대통령이 실권을 잡게 될 것이란 예상이 나온다. FT는 “카자흐스탄 사태는 구소련 주변국을 거느리고 지역 패권을 추구하려는 푸틴의 가장 큰 약점이 ‘민주화’임을 드러낸 사건”이라고 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