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이탈리아 총리가 된 마리오 드라기(74)가 1년여 만에 물러나 유럽연합(EU) 정상들이 모이는 이사회 의장이나 이탈리아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면서 온 유럽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그의 리더십 덕분에 최근 위기에서 부활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이탈리아가 다시 ‘유럽의 문제아’로 돌아가는 게 아니냐는 걱정 때문이다. 이탈리아와 손잡고 미래 지향적인 EU를 만들려 했던 프랑스와 독일의 계획에도 차질이 빚어질 수 있다.
발단은 지난 22일 기자회견이었다. 드라기는 자신의 미래 계획을 묻는 질문에 “개인적인 운명은 중요치 않다. 누가 총리 자리에 앉든 국정이 지속될 여건을 마련했다”고 말했다. 그러자 라레푸블리카 등 이탈리아 언론들이 ‘(드라기가) 총리에서 물러날 수 있다’고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특히, 내년 2월엔 이탈리아 대통령, 5월엔 유럽 이사회 의장의 임기가 끝난다는 점을 거론하며 “그가 둘 중 하나에 출마가 유력하다”는 관측을 쏟아냈다.
유럽 이사회 의장은 27국 정상들이 모인 이사회의 수장이다. 흔히 ‘EU의 대통령’으로 불린다. 27국 정상들의 투표로 뽑힌다. 유럽 이사회는 벌써 드라기 총리를 유력 차기 의장 후보로 올려놓은 것으로 알려졌다. EU 내부 사정에 훤한 데다, 프랑스와 독일 등 EU 핵심 국가에서 신뢰받고 있어 회원국 간 의견 조율이 힘든 EU 내 정치에서 상당한 추진력을 발휘할 것으로 기대된다는 것이다.
내각제인 이탈리아의 대통령은 상징적 역할이 크지만, 비상시 의회 해산과 총리 후보자 지명 등 무시 못 할 권한이 있다. 상·하원 의원 전체와 이탈리아 20주에서 선출된 대표 58명이 모여 3분의 2의 지지를 받는 후보가 나올 때까지 계속 투표해 선출한다.
유럽 이사회 의장이든, 이탈리아 대통령이든 드라기에겐 ‘영전(榮轉)’이지만 유럽은 좌불안석이다. 그가 이탈리아에서는 보기 드문 능력 있는 정치인이었던 탓이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벌써 그의 빈자리가 클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고 전했다.
드라기는 미국 MIT 경제학 박사 출신으로 이탈리아 중앙은행 총재와 골드만삭스 부회장을 거쳐 2011년부터 9년간 유럽중앙은행(ECB) 총재를 지냈다. 유럽에 금융 위기가 닥친 2012년엔 유로화 채권 투자자들을 적극적으로 설득하고, 과감한 금융 완화를 펼쳐 위기를 극복했다. 이때 ‘수퍼 마리오’란 별명이 생겼다.
총리가 된 이후 국내 정치서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극우부터 극좌까지 사분오열한 이탈리아 정계의 총 6개 주요 정당을 설득, 거국(擧國)내각을 수립했다. 그의 내각에 참여한 상·하원 정당의 의석은 90%가 넘는다. 의회의 압도적 지지를 바탕으로 친환경 경제 전환, 디지털 혁신, 철도·도로 확충 등 사회·경제 개혁 프로그램(PNRR)에 착수했다. 작년 -8.9%를 기록했던 경제성장률은 올해 5.7%로 반전을 이뤄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는 “EU의 비행 청소년 같은 이탈리아가 드라기 총리 이후 모범생이 됐다”고 평가했다. 최근 여론조사에서 드라기 총리의 국정 지지율은 65%에 달했다.
이탈리아 언론들은 “그가 사임할 경우 구심점을 잃어버린 거국내각이 1년여 만에 붕괴하며 조기 총선으로 갈 수 있다”는 관측을 내놓고 있다. 정치 전문 매체 폴리티코는 “정국 혼란으로 사회·경제 개혁 드라이브가 약화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프랑스와 독일도 난감하다는 분위기다. 두 나라 모두 이탈리아를 자국 편으로 끌어들이려 드라기 총리에게 구애하는 상황이었다. 특히 프랑스가 적극적이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 드라기 총리는 연간 국내총생산(GDP)의 3%로 제한된 EU 회원국의 재정 적자 한계를 완화해 정부 주도의 투자를 늘리자는 데 합의하는 등 밀착하는 모습을 보였다. 두 사람은 지난달 26일에는 경제·안보·이주·통상·교육 등에서 광범위하게 협력한다는 ‘퀴리날 조약’도 맺었다.
독일도 부랴부랴 이탈리아에 러브콜을 보냈다. 올라프 숄츠 총리는 지난 20일 직접 로마로 날아가 드라기 총리에게 “수소·전기차·배터리 등 첨단 산업 기술 협력을 하자”고 제안했다. 드라기 총리 덕분에 이탈리아의 몸값이 부쩍 올랐던 셈이다.
하지만 드라기가 총리에서 물러나면 이런 공든 탑이 무너질 수 있다. 새 이탈리아 총리의 성향에 따라 EU의 미래를 처음부터 다시 논의해야 한다는 얘기다. 드라기는 아직 자신의 거취에 대해 추가 언급을 내놓지 않고 있다. 프랑스 주간 누벨옵세르바퇴르는 “유럽 이사회 의장이든 이탈리아 대통령이든 드라기는 충분한 자격이 있고, (자리를 맡을) 가능성도 크다”며 “결단은 드라기 개인이 (지금까지 경험한) 이탈리아 정당 정치의 미래에 대해 어떤 판단을 하느냐에 달렸다”고 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