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초음속(hypersonic) 미사일 개발을 총괄하는 러시아의 고위급 정부 과학자가 해외 국가들로 기술을 빼돌린 혐의로 러시아 정부에 체포됐다. 러시아 사법 당국은 그에게 반역죄를 적용할 방침으로, 러시아제(制) 최첨단 미사일 기술들이 미국이나 서방으로 유출됐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러시아의 극초음속 미사일은 기존 위성이 감지하기 힘든 매우 낮은 고도에서 날아 현 미국의 미사일 방어 체계로도 요격은 물론 탐지 자체가 어려워 ‘게임 체인저(Game Changer·상황을 완전히 바꾸는 것)’로 불린다.
12일(현지 시각) 러시아 타스통신·영국 일간 가디언에 따르면 러시아 모스크바의 레포르토보구(區) 법원은 이날 러시아 제2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위치한 ‘러시아 극초음속 시스템 연구소(HSRI)’의 소장이자 수석 설계자인 알렉산드르 쿠라노프를 기밀 유출 혐의로 체포했다고 밝혔다. 이날 법원은 심리를 열어 재판이 열리기 전까지 쿠라노프 소장을 2개월간 미결 상태로 구금하기로 판결했다. 가디언은 “쿠라노프에게 국가 반역죄가 적용될 방침으로 그는 최대 20년형에 처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HSRI에 따르면 올해 73세의 쿠라노프 소장은 극초음속 기술 전문가로 1970~1980년대 소련에서 처음 개발한 극초음속 비행체 ‘야악스’ 연구에 참여하고 이를 감독했다. 현재까지 러시아 내 최고 방위 산업 기술자 중 한 명으로 알려져 현대 러시아 극초음속 미사일 핵심 기술 상당수가 유출됐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미 군사 전문 매체 디펜스뉴스 등은 전했다. 실제 러시아 인테르팍스통신은 익명의 소식통을 인용해 “쿠라노프가 외국인에게 특정 연구 기밀 정보를 넘겨준 것으로 확인됐다”고 전했다.
통상 극초음속 미사일은 최대 100㎞ 정도까지만 날아올라 대기권 밖 요격이 불가능하다. 활강 시 비행경로와 목표물도 수시로 변경할 수 있어 궤도 예측이 매우 힘들다. 또 음속의 5배 이상인 극초음속 비행이라 음속 이하의 크루즈미사일을 상대하는 지대공 미사일의 요격 능력 밖이다. 궤도를 미리 계산해 대기권 밖이나 미사일이 목표물에 도달하는 하강 단계에서 탄두를 요격할 수 있는 일반적 탄도미사일보다 방어하기 훨씬 어렵다.
이 분야에서 러시아는 미국이나 중국을 압도하는 성과를 보여왔다. 러시아 국방부는 작년 말 최대 속도가 마하 8(음속의 8배) 이상인 극초음속 순항미사일 ‘지르콘’ 시험 발사에 성공했다며 관련 영상을 공개했다. 북극권 바렌츠해에서 발사된 이 미사일은 450km 떨어진 해상 목표물을 성공적으로 타격한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같은 해 10월에도 지르콘 미사일 시험 발사에 성공한 바 있다. 2019년 12월엔 극초음속 미사일 ‘아방가르드(Avangard)’를 실전 배치했다고 발표했다. 이 미사일은 99㎞의 낮은 고도까지만 날아오른 후 궤도를 수정하며 활강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어떤 방어 시스템도 뚫을 수 있다”고 했다.
반면 미국은 애초 ‘팰컨(Falcon)’이라 이름 붙인 극초음속 비행체 개발에 나섰으나 2010~2011년 연거푸 시험 비행에 실패한 뒤 의회가 예산을 거둬들여 한동안 개발을 중단했다. 미 공군은 지난달 28일 캘리포니아주 남부 해안에서 자체 개발 중인 AGM-183A 극초음속 미사일(ARRW) 시험발사를 진행했지만 지난 4월에 이어 연거푸 실패했다.
중국은 미국보다는 훨씬 나은 형편으로 ‘DF(둥펑)-17′ ‘DF-15’ 등 주한·주일 미군 등을 겨냥한 극초음속 무기 다수를 보유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서방 연구 기관들에 따르면 러시아의 동종 전력에는 아직 열세인 것으로 분석된다.
러시아에선 2014년 우크라이나 크림 반도 강제 병합으로 서방과의 관계가 최악으로 치달은 후부터 반역죄 사건이 급증하고 있다. 가디언에 따르면 상당수 러시아 과학자·군인·공무원들이 최근 몇 년간 민감한 정부 자료를 해외에 건넨 혐의로 인해 반역죄로 기소되고 있다. 디펜스뉴스는 “러시아 관료들은 자국으로부터 신기술을 탈취해 가는 스파이 요원들이 최근 급증해 이에 대한 적개심을 드러내고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