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정 러시아 마지막 공주 아나스타샤의 일대기를 각색한 미국 영화 '아나스타샤'의 한 장면. 주인공 아나스타샤(오른쪽부터 둘째)가 손으로 스파게티를 집어먹고 있다. /Freestyle Digital Media 유튜브 캡처

제정(帝政) 러시아의 마지막 공주 아나스타샤 로마노바의 일대기를 그린 한 미국 영화가 러시아 국민의 분노를 낳고 있다. 이들은 영화가 공주의 일대기를 10대용 판타지 코믹물로 가공한 데 대해 “9·11 테러를 시트콤으로 만든 격”이라며 분통을 터뜨리고 있다.

영화는 공주와 동명(同名)의 ‘아나스타샤’라는 1시간 30분짜리 영화로 지난 4월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개봉했다. 1917년 2월 러시아 혁명 전야, 군중이 황궁에 들이닥칠 때 아나스타샤가 마법의 힘으로 1988년 미국으로 탈출, 한 미국인 가정의 도움을 받아 자신을 죽이려는 블라디미르 레닌의 음모에 맞선다는 내용이다. 지난달 중순부터 뒤늦게 러시아 일각에서 이 영화를 “러시아 역사에 대한 모독”이라고 평가하면서, 개봉 5개월 만에 러시아 내 화제로 떠오르고 있다.

제정 러시아 마지막 공주 아나스타샤의 일대기를 소재로 지난 4월 개봉한 미국 판타지 영화 '아나스타샤' 포스터. /Freestyle Digital Media

영화는 러시아인들의 자존심을 건드렸다는 평을 받는다. 영화 속 아나스타샤는 미국인들 앞에서 포크 사용법을 몰라 손으로 스파게티를 집어먹고, 자기 일가의 처형 사실이 담긴 역사책을 읽고도 별 반응 없이 놀러갈 생각에 들떠 있다. 러시아 모스크바타임스는 “기품 있는 아나스타샤를 무식한 야만인으로 그리고, 러시아 혁명 지도자 레닌의 외관은 하층 잡상인처럼 묘사해놨다”고 평했다.

실제 역사에서 아나스타샤는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막내딸로,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제정이 무너진 이듬해 볼셰비키(구 소련 공산당의 전신)에 의해 총살됐다. 당시 17세였다. 볼셰비키는 이 사건을 공개하지 않았고, 역대 소련 지도자들도 쉬쉬해 “아나스타샤가 아직 살아있다”는 등 온갖 뜬소문이 돌았다. 소련 붕괴 이후 공주 일가의 시신이 수습돼 1998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안장되면서 소문은 일단락됐다.

보리스 옐친 당시 러시아 대통령은 “그들의 살해는 러시아 역사에서 가장 부끄러운 일 중 하나”라고 했다. 공주 일가는 2000년 러시아정교회의 성인으로 공인될 정도로 러시아 국민의 사랑을 받고 있다. 2018년 설문조사에 따르면 러시아인 60%가 공주 일가의 살해를 부당하게 여긴다. 지난달 18일 러시아 정교 매체 오소독스 크리스챠니티에 따르면 러시아 마지막 로마노프 황가 후손 단체 대표 알렉산드르 자카토프는 “이 영화를 황실 모욕으로 간주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