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일(현지 시각) 우크라이나와 맞닿은 벨라루스 체르니히프의 국경 검문소. 총과 방패로 무장한 국경 요원들 앞에 챙 달린 검은 모자와 검은 옷을 입은 유대인 남성 수백 명이 진을 쳤다. 이들은 사흘째 이곳에서 노숙 중이다. 영국 BBC에 따르면 이곳뿐 아니라 우크라이나와 접한 벨라루스 국경 곳곳의 검문소에 최다 3000여 명에 달하는 유대인이 ‘뻗치기(무한정 대기)’를 하고 있다. 우크라이나에 가려는 것이다.
이들은 초(超)정통파 유대교 신자인 하레디의 한 분파 하시디즘 유대인들이다. 이달 18~20일 유대교 새해 명절 ‘로시 하샤나’를 맞아 우크라이나를 찾으려는 순례객이다. ‘로시 하샤나’는 유대력(歷)으로 새해를 뜻하는데, 유대력의 1월은 우리가 사용하는 달력의 9월과 시기가 비슷하다. 매년 이 시기 하시디즘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옛 지도자인 나흐만의 무덤을 순례한다. 무덤이 바로 우크라이나 중부 도시 우만에 있다. 그런데 이들은 폴란드·슬로바키아·루마니아·러시아 등 다른 우크라이나 접경국들을 제쳐두고 하필 벨라루스에 집결했을까.
우크라이나는 코로나 재확산을 막기 위해 지난달 29일부터 한 달간 국경을 폐쇄 중이다. 올해 순례를 포기해야 할 판인데 마침 “벨라루스를 통해선 우크라이나로 들어갈 수 있다”는 소문이 번지기 시작했다. 소문은 미국·프랑스·이스라엘 등 세계 각지의 하시디즘 유대인 순례객들을 벨라루스로 불러 모았다고 뉴욕타임스는 전했다. 이 소문은 벨라루스 당국이 퍼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벨라루스 대통령은 16일 관료들에게 “순례객들을 위해 최대한 편의를 제공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는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 우만을 오가는 버스를 제공하겠다는 지원책을 내놓기도 했다. 하지만 코로나 새 확진자가 하루 2000명 안팎이라 방역이 급한 우크라이나는 여전히 국경 문을 걸고 있다. 우크라이나는 “유대인 순례객들에게 헛된 희망을 심어준다”며 벨라루스를 비판했다.
왜 순례객들이 골탕을 먹어야 하는 걸까. 독일 도이체벨레 등 외신들에 따르면 지난달 벨라루스 대선을 둘러싼 양국 갈등이 작용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루카셴코는 80% 넘는 득표율로 당선했지만 곧장 부정선거 의혹에 휩싸였다. 매일 대선 불복 반(反)정부 시위에 직면해 있는 루카셴코는 친러시아 노선을 분명히 해 경제 지원 등을 받는 방법으로 위기 탈출을 노리고 있다. 하지만 2014년 러시아의 침공으로 크림반도를 병합당한 우크라이나는 EU와 발맞추며 벨라루스 대선을 부정선거로 규탄하고 있다.
벨라루스가 우크라이나에 대한 앙갚음으로 유대인 순례객 원조 카드를 꺼내 들었다는 해석이 나오는 이유다. 유로뉴스는 “유대인 명절을 볼모로 양국의 기묘한 기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