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이 글로벌 다자 외교 무대에서 미국의 빈자리를 메우며 국제 질서 재편에 속도를 내고 있다. 중국은 브라질 벨렝에서 21일까지 열리는 제30차 유엔 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COP30)에서 전통적으로 미국을 비롯한 서방의 의제였던 기후 이슈를 주도하고 있고, 앞서 경주에서 열린 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정상회의에서도 사실상의 주빈(主賓) 역할을 했다. 미국이 22~23일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열리는 G20(20국) 정상회의에도 불참을 예고한 가운데, 중국이 ‘실질적 리더’를 자처하며 외교적 영향력 강화에 나서는 모습이다.
15일 로이터에 따르면 중국은 학계·업계 전문가 위주의 소규모 전시관을 차렸던 예년과 달리 이번 COP30에서 개최국 브라질과 함께 전시장 입구의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했다. 세계 1위 배터리 업체인 중국 CATL이 처음으로 이 총회에서 독자 행사를 열어 청정 기술 전략을 홍보했고, 중국 1위 전기차 기업 BYD는 브라질 공장에서 생산한 하이브리드 차량을 행사 공식 운송 수단으로 지원하며 기술력을 과시했다.
브라질 외교 당국은 COP30 의제 조율 과정에 중국이 적극 개입했다고 밝혔다. 로이터는 “막후에서 각국을 결집시켜 합의를 이끌어내던 미국의 역할을 중국이 하고 있다”고 했다. 기후 외교의 ‘변방’이었던 중국이 기술력과 외교력 양측에서 주도권을 행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프란체스코 라 카메라 국제재생에너지기구(IRENA) 사무총장은 “물이 빈 공간을 향해 흐르는 이치는 외교도 마찬가지”라며 “재생에너지와 전기차 분야에서 중국이 구축한 경쟁력이 외교적 영향력 확대로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런 변화는 미국의 기후 정책 후퇴와 맞물린 변화라는 분석이 나온다. 기후변화 위기론이 “사기극”이라고 주장하는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2기 취임 직후 기후변화 대응을 위한 파리협정에서 탈퇴했다. 반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지난 9월 유엔 기후 정상회의에서 “일부 국가가 흐름에 역행하고 있지만, 녹색·저탄소 전환은 우리 시대의 흐름”이라는 발언으로 미국을 에둘러 비판하고 ‘기후 수호자’ 이미지를 부각했다.
미국은 아프리카에서 처음 열리는 남아공 G20 정상회의에도 불참을 선언한 상태다. “남아공에서 백인 학살과 인권침해가 만연하다”고 주장하며 일찌감치 불참을 예고한 트럼프는 G20에 미국 당국자가 참석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트럼프 대신 J D 밴스 부통령이 참석하려던 계획도 취소됐다. 내년 G20 의장국인 미국은 올해 회의에서 남아공으로부터 의장국 지위를 넘겨받아야 하는데도 이 같은 결정을 내렸다. 반면 중국은 시진핑 주석 대신 2인자인 리창 국무원 총리를 파견해 실질적 참여를 이어갈 예정이다.
미국은 경주 APEC 정상회의 때도 트럼프가 부산 미·중 정상회담을 마친 뒤 본회의 직전 귀국해 사실상 ‘반쪽 참석’에 그쳤다. 트럼프 대신 본회의에 참석한 스콧 베선트 미 재무장관이 ‘자유무역·개방경제’ 의제에 반대 입장을 밝히면서, 30여 년간 APEC의 핵심 가치였던 ‘자유무역’ 등 표현이 ‘경주 선언’에서 사라졌다. 공급망 안정, 디지털 통상, 탈탄소 전환 등 핵심 현안에서도 미국의 소극적 태도 속에 구체적 합의를 도출하지 못했다. 반면 주요 행사에 모두 참석한 시진핑은 “다자 무역 시스템을 함께 지키자”고 주장하며 존재감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