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미원조酒와 김일성 얼굴이 들어간 지폐 - 25일 중국 단둥(丹東)시내의 한 잡화점에서 직원이 포탄처럼 생긴 ‘항미원조주’를 매대에 진열하고 있다. 오른쪽 사진은 단둥 압록강단교 앞 가판대에서 파는 북한의 5000원권 지폐로, 김일성 얼굴이 담겨 있다. /이벌찬 특파원

25일 저녁 중국의 북한 접경 지역인 단둥(丹東)의 창뎬 허커우(長甸河口). 압록강 하류인 이곳에서 중국 관광객 45명과 함께 유람선을 탔다. 여행사의 안내문에는 ‘출경[出境·국외] 관광이 아니다’라고 적혀 있었지만, 어느새 배는 북한 신의주 육지로부터 1㎞ 떨어진 지점까지 이동해 있었다. 중국인 여행객은 자신의 휴대폰을 꺼내 보이며 “이곳에 오니 자동으로 ‘평양 시각’으로 바뀌었네”라고 했다. 유람선과 나란히 물살을 가르던 8인승 보트는 신의주에서 불과 400m 떨어진 지점까지 붙었다. 여행사 가이드는 “’항미원조(抗美援朝·6·25전쟁)’ 승리 70주년을 앞두고 중·북 관계가 개선되고 교류도 서서히 늘어나면서 이달부터 중국 유람선이 북한 가까이 접근할 수 있게 됐다”고 했다. 단둥에선 최근 매일 10여 척의 유람선이 운행하고 있어 하루 4000~5000명의 중국인이 신의주 코앞까지 가고 있다.

중국에서 6·25전쟁 정전 협정 체결 70주년인 27일을 ‘항미원조 승리 70주년’이라고 부르며 대대적으로 기념하고 있다. 각종 기념 행사를 열고 북·중 교류를 확대하면서 북한과의 우애를 과시하는 데 힘을 쏟고 있는 것이다. 북한은 7·27을 ‘전승절’이라고 부르며 국가적 기념일로 기리지만, 중국에서는 6·25전쟁 참전일(10월 25일)을 ‘항미원조 기념일’로 삼아 왔다. ‘전승절 기념’ 행보는 이례적이다. 기념일을 기점으로 3년 6개월 동안 코로나로 막혔던 북·중 국경 개방이 급물살을 탈 가능성도 제기된다. 중국은 미·중 경쟁이 격화되는 상황에 한·미·일 공조가 최근 강화하자, ‘미국의 침략을 막아낸 전쟁’으로 미화한 6·25전쟁이 북한과의 유대 강화 및 내부 결속에도 도움 될 것으로 판단한다.

25일 단둥 시내에서 약 60km 떨어진 창뎬 허커우의 압록강에서 중국 관광객들을 실은 보트가 북한 신의주 코앞까지 운행하고 있다.(왼쪽) 이날 압록강에서 탑승한 유람선이 신의주에서 불과 1km 떨어진 곳까지 운행하자 한 중국인 관광객의 아이폰 시간 설정이 '평양 시각(베이징 시각보다 1시간 빠름)'으로 바뀌었다. 코로나 이후 북한은 중국인들의 현지 관광을 차단하고 유람선이 신의주 가까이 운행하는 것도 막아왔지만, 최근 북중 관계가 개선되고 코로나 방역이 완화되면서 중국 국기를 꽂은 유람선이나 보트가 북한 가까이 운행할 수 있게 됐다. /단둥=이벌찬 특파원

이날 찾은 단둥에선 중국의 ‘항미원조 띄우기’ 시도를 곳곳에서 목격할 수 있었다. 단둥 시내의 한 잡화점에선 단둥산(産) 바이주인 ‘항미원조주(酒)’를 좋은 위치에 진열해 놓고 팔았다. 술병이 짙은 녹색의 포탄 모양이다. 판매 직원은 “7·27이 다가오고 있지 않은가. 요즘 가장 잘 팔리는 술”이라고 했다. 금색 총알 모양과 로켓 발사대를 분리할 수 있게 병을 디자인한 항미원조주도 보였다. 단둥 압록강단교(斷橋) 앞 가판대에선 김일성 얼굴이 인쇄된 5000원짜리 북한 지폐를 팔고 있었다. 한 장에 10위안(약 1800원)에 팔면서 “부적처럼 쓰면 된다”고 했다. ‘김일성’은 중국어로 읽으면 ‘오늘은 성공한다(今日成)’와 발음·성조가 같다. 단둥의 한 식당 직원 휴대폰 투명 커버 속엔 ‘김일성 지폐’가 보였다.

단둥에 위치한 중국 유일의 항미원조기념관엔 이날 수용 인원의 두 배인 1만2000명의 인파가 몰렸다. 2020년 전면 재공사를 거쳐 다시 연 이곳은 미국과 북한에 대한 중국의 현재 사고방식을 집중적으로 투영한 장소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문을 거의 열지 않았다가 올해 들어 본격적으로 개방하자 7·27을 앞두고 관광객이 몰리고 있다. 전시관은 1층에 ‘북·중 우의관’을 별도로 만들어 북·중 혈맹을 강조했다. 전체 기념관에 6개뿐인 동상 중 하나가 북·중 군인이 손잡은 모습을 구현한 것이다. 동상 옆에 적힌 “중조(中朝·중국과 북한) 양국 인민과 군대가 선혈로 빚은 위대한 우의는 영원할 것”이란 문구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한 말에서 따왔다.

25일 단둥에 위치한 중국 유일의 항미원조기념관에서는 수용 인원의 두 배인 1만2000명의 인파가 몰렸다. 2020년 전면 내용 수정을 거쳐 재개관한 이곳은 미국과 북한에 대한 중국의 현재 사고방식을 고스란히 투영한 곳이다. 전시관 1층에 마련된 ‘중조(북중)우의관’의 출구에는 '조중 친선' 휘장이 걸려 있고(왼쪽), 중국이 미국의 공급망 배제에 맞서 싸우는 현 상황을 연상케 하는 ‘철도 운송로 확보 작전[鋼鐵運輸線]’은 별도 재현 부스가 차려져 있다.(오른쪽)/단둥=이벌찬 특파원

2층의 메인 전시관의 테마는 적나라한 ‘반미(反美)’였다. 참전 배경은 ‘조선(한반도) 내전 폭발 후 미국이 조선과 중국 영토 대만을 무장 침략’이라고 설명했다. 미국에 맞서 선전한 장진호·운산성·상감령 전투와 ‘철도 운송로 확보 작전’은 별도 재현 부스가 차려져 있었다. 6·25전쟁 발발을 다룬 부분에선 북한의 ‘남침’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 전시에서 ‘남조선(한국)’ 언급은 찾아보기 어려웠지만 유독 ‘백호연대 기습 사건’은 재현 부스(총 5개의 부스 중 한 개)까지 만들어 조명했다. 이 사건은 국군 수도사단 소속 백호연대에 중국인민지원군이 침입해 이승만 대통령이 하사한 부대 깃발(백호기)을 빼앗은 일이다. 설명문에는 ‘정전에 반대한 이승만을 징벌한 것’이라고 적혀 있었다. 전시관은 ‘항미원조 전쟁은 위대한 승리’라는 문구를 걸고 ‘미국은 조선 전체를 점령하고자 하는 목적을 이루지 못했고, 침략군(미국)은 실패 운명에 직면했다’, ‘전쟁 승리는 중화민족의 100년 간 유린 당하고 능욕 받던 연약한 상태를 철저히 바꿨다’고 주장했다.

단둥의 주요 호텔은 베이징에서 단체로 수학여행을 위해 몰려온 학생들로 붐볐다. 베이징 명문 고등학교인 ‘베이징 제8중’은 단둥 중롄호텔에서 ‘항미원조 정신 교육 행사’를 25일 열었다. 이날 중롄호텔은 방이 하나밖에 남지 않을 정도로 ‘항미원조’ 체험 관광을 온 투숙객으로 가득 찼다. 중국 인터넷도 항미원조를 강조하는 콘텐츠가 넘쳐났다. 26일 바이두(중국판 네이버)의 메인 화면에는 ‘위대한 승리 기억’이란 추천 검색어가 걸렸다. ‘항미원조 전쟁 승리일’을 다룬 중국 국영 CCTV·신화통신의 기사도 상단에 배치됐다.

26일 단둥의 주요 호텔에는 '항미원조 승리 7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 안내판(왼쪽)이 세워지고, 중국인민지원군 출신 참전 군인의 투숙을 환영하는 플래카드(오른쪽)가 걸렸다./단둥=이벌찬 특파원

북한은 코로나 발생 이후 처음으로 7·27에 중국 대표단을 초청했다. 2020년 초 코로나 확산 이후 첫 초청이다. 7·27을 계기로 삼아 중국과의 관계를 본격적으로 복원하겠다는 신호라고 외교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리훙중 중공 중앙위원회 정치국위원(부총리급),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부위원장 등이 기념 행사 참가를 위해 26일 북한에 도착했다. 마오닝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이날 “북·중 관계의 발전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강조했다. 북·중 고위급 교류가 재개되면서 단둥과 북한 신의주를 잇는 새로운 다리인 압록강대교가 올해 가을 개통될 가능성도 주목받고 있다. 2014년 중국이 자금을 대 완성한 이 다리는 중국으로부터의 유입 통로가 늘어나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는 북한 측의 거부로 개통이 지연돼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