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핑 주석의 연임이 걸린 공산당 19기 중앙위원회 6차 전체회의(19기6중전회)가 끝난 게 지난 11월11일이었죠. 이날 중국과 홍콩 증시는 중국 최대 반도체 위탁 생산(파운드리) 업체인 SMIC(중국명 中芯國際)의 공시에 요동을 쳤습니다. 이 회사 대만계 이사 3명이 집단으로 사임한다는 발표가 나왔죠.
SMIC는 2000년 대만계 미국인 장루징(張汝京)이 창업한 회사로 상하이에 본사가 있습니다. 지금은 중국 정부 측 지분이 50% 이상인 사실상의 국유기업이 됐죠.
◇중국 반도체의 희망인데...
중국은 2년 전부터 미국의 강도 높은 반도체 제재로 큰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반도체 칩을 못 사게 된 화웨이는 잘 나가던 휴대폰 사업을 접어야 했죠. ‘반도체 독립’을 외치며 막대한 자금을 투자했던 국유기업 칭화유니그룹은 파산 절차가 진행 중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나마 중국이 희망을 거는 곳이 SMIC입니다. 28나노 공정은 안정돼 있고, 14나노 공정도 개발을 거의 끝낸 상태에서 수율(결함이 없는 합격품 비율) 올리는 작업이 진행 중이죠. 28나노 칩은 요즘 품귀 현상을 빚는 자동차용 반도체에 들어갑니다.
7나노 반열의 삼성전자, TSMC에 비하면 아직 5년 이상의 기술 격차가 있죠. 그래도 작년 매출이 40억 달러에 이르는 세계 5위의 파운드리 업체입니다.
대만계 임원 몇 명 빠졌다고 무슨 난리냐고 하겠지만, 사실 SMIC가 이 정도 기술력을 갖게 된 원동력이 바로 대만계 기술 인력입니다.
중국은 2015년부터 3000명 이상의 대만 반도체 인력을 대거 스카우트했죠. 대만에서 받는 임금의 2~3배를 주고 데려온 인력으로 기술 기반을 구축한 겁니다.
◇TSMC 연구개발 책임자 출신들 이탈
이날 부회장직과 이사직에서 동시에 사임한 장상이(蔣尙義ㆍ75)는 미국 스탠퍼드대 박사 출신으로 ‘텍사스 인스트루먼트(TI)’에서 일했던 인물입니다. 1997년 대만 TSMC에 합류해 이 회사의 반도체 제조 기술을 세계 수준으로 끌어올렸죠. TSMC에서 퇴임한 이후 3년간 SMIC 사외이사를 지내다 작년 말 부회장으로 영입됐습니다.
량멍쑹(梁孟松ㆍ69) 공동 사장은 이사직은 사임하고 공동 사장직만 유지했습니다. 량 사장은 반도체 기술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인물이죠. 버클리 캘리포니아대 박사 출신으로 TSMC 시절 장 부회장 밑에서 개발을 총괄했습니다.
삼성전자에서 부사장으로 6년간 근무한 적도 있죠. 2017년 SMIC에 합류한 이후 3년여 동안 28나노 공정을 안정시켰고, 14나노 기술 개발을 주도했습니다.
사외이사 직에서 물러난 양광레이(楊光磊ㆍ62)도 미국 MIT대 링컨연구소 연구원 출신으로, TSMC에서 연구개발 책임자로 일한 적이 있죠.
대만 TSMC 연구개발 책임자 출신으로 SMIC에 합류한 3명의 고위급 인력들이 동시에 물러난 셈입니다. 이들이 끌고 다니는 수하의 기술 인력들도 같이 빠져나가겠죠.
이들이 비운 자리는 중국계 인사들이 차지했는데, 시장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SMIC는 홍콩 증시와 상하이 증시에 상장돼 있는데, 이날 주가가 5~6% 떨어졌어요.
◇“미국 제재에 내분 폭발”
사임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분석이 있습니다. 량멍쑹 사장은 작년 말 장상이 부회장이 부임할 때도 사표를 낸 적이 있죠. 사장으로서 자신이 기술 개발을 총괄하는데, 예고도 없이 과거 상사를 윗자리에 데려다 놓겠다니 기분이 좋지 않았을 겁니다.
SMIC는 대만계와 중국계, 해외귀국파 사이에 파벌 싸움이 치열한 것으로 유명하죠. 이런 내부 알력도 작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근본 요인은 역시 미국의 제재라고 봐야겠죠.
SMIC가 세계 수준을 따라가려면 10나노 이하 공정을 개발해야 하는데, 미국이 그에 필요한 장비 공급을 막아놨습니다. 작년 12월 SMIC를 제재 대상에 올려 7나노 제품 개발과 생산에 필수적인 네덜란드 ASML사의 극자외선(EUV) 노광장비를 구입할 수 없도록 했죠.
추가 기술 개발이 어려워진 상황에서 회사의 진로를 두고 이사회에서 노선 투쟁이 치열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대만계 경영진의 사퇴로 이어졌다는 게 업계 전문가들의 분석이에요.
중국은 반도체 투자 자금으로 1000억 달러 이상을 쌓아두고 있지만, 인력과 장비 없이는 한 발짝도 내디딜 수가 없는 게 반도체 산업의 현실이죠. 중국 내에서는 ‘미국의 목조르기에 중국 반도체 산업이 막다른 골목에 몰렸다’는 탄식이 흘러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