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든 행정부 출범 이후 처음 열린 3월 18~19일 미중 알래스카 회담이 전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죠. 미디어에 공개된 71분간의 모두 발언 시간은 창과 창의 대결이었습니다. 거의 막말 수준의 공방이 오갔죠. 독일의 한 일간지는 “미중관계가 빙하기에 접어들었다”고까지 썼습니다.
이날 회담에는 미국 측에서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과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중국 측에서 양제츠 중앙외사판공실 주임(정치국원)과 왕이 외교부장이 각각 참석했습니다.
◇ 미국측 신장, 홍콩, 대만 문제 등 일일이 거론...”대립 회피하지 않을 것”
양측은 당초 각각 2분씩의 모두 발언을 공개하기로 했다고 해요. 처음 발언에 나선 블링컨 국무장관은 동맹국인 한국과 일본을 다녀온 사실을 전하면서, “바이든 행정부는 규칙에 기반한 국제질서를 강화시켜나갈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이어 신장과 홍콩, 대만 문제, 중국의 사이버 공격과 미국 동맹국에 대한 경제 보복 등을 거론하면서 이런 행위들은 규칙 기반의 국제질서를 위협하는 것이라고 비판하죠.
바이든 행정부 시대 미중관계에 대해서는 “경쟁할 분야는 경쟁하고, 협력할 수 있는 분야는 협력할 것이며, 대립해야할 분야는 반드시 대립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2분30초 가량의 짧은 분량에 미국의 단호한 입장을 담았습니다.
다음으로 발언에 나선 설리번 보좌관도 조 바이든 대통령이 주최한 첫 쿼드(아시아태평양 지역 4개국) 정상회의에 대해 언급하면서 “동맹과의 협력관계를 바탕으로 자유롭게 열린 인도·태평양을 만들어가는 게 미국 외교정책의 기초가 될 것”이라고 했죠. 그 역시 “이번 회담에서 기본 가치에 위배되는 (중국의) 경제·군사적 위협에 대해 논의할 것”이라면서 “우리는 솔직하고 직접적이며, 분명하게 얘기할 것”이라고도 했습니다.
◇ 양제츠 ‘도살’ 용어까지 쓰며 “미국 인권이나 잘 챙겨라” 반박
미국 측의 발언이 끝나자 양제츠 주임이 나섰습니다. 그는 약속한 2분의 8배가 넘는 16분14초 동안 발언해요.
양 주임은 신장과 티베트, 대만 문제에 대해서는 “중국 내정 문제로 미국의 간섭에 결연히 반대한다”고 했습니다. 인권 문제에 대해서는 “미국도 흑인을 도살하는 등 인권 문제가 있으니 각자 할 일 잘하면 된다”고 했고, 사이버 공격에 관해서는 “이 분야는 미국이 챔피언 아니냐”고 비꼬았지요.
양 주임은 나아가 “미국이나 서방은 자신들이 국제사회의 여론을 대변한다고 생각하는데, 전체 국제사회는 미국이 주장하는 보편 가치가 국제 여론을 대변한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라고도 했습니다.
왕이 외교부장도 “초청을 받아 이곳으로 왔는데, 우리가 출발하기 전날 미국은 홍콩과 관련해 제재를 가했다”면서 “이것이 미국이 손님을 환영하는 방식이냐”고 비난했죠. 그의 발언 역시 4분을 넘어갔습니다.
◇ 난타전 벌어진 추가 발언 시간
왕 부장 발언이 끝난 후 취재진이 나가려 하자 이번엔 블링컨 국무장관이 막아 세웁니다. “양 주임이 길게 말씀하셨으니, 우리도 추가로 얘기를 하겠다”고 나선 거죠.
그는 “취임 이후 한국과 일본을 포함해 거의 100개 국가와 소통을 했다”면서 “많은 동맹국과 협력국이 미국의 국제사회 귀환에 만족하고 있으며 중국의 행동에 대해 깊이 우려하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흑인 인권 문제 등에 대해서는 “우리는 실수를 하고 때로 퇴보하기도 한다”고 인정하면서 “다만, 그런 문제들을 무시하거나 없는 것처럼 하거나 숨기지 않고 공개적으로 드러내고 투명한 방식으로 해결에 도전한 것이 우리의 역사”라고 했죠. 중국처럼 은폐하고, 언론에 재갈을 물리지 않는다는 반박이었습니다.
마지막은 바이든 대통령이 부통령 시절 시진핑 부주석과 만났을 때 했다는 말로 마무리를 했죠. “바이든 대통령은 당시 ‘미국에 맞서는 것은 좋은 선택이 아니다’고 했는데, 그 말은 지금도 진실”이라고 했습니다.
설리반 보좌관도 “자신감이 있는 국가는 자신의 결점을 면밀하게 살펴보고, 끊임없이 개선책을 모색한다”며 “그것이 미국의 힘”이라고 했습니다. 지난달 화성에 착륙한 퍼시비어런스 로봇 프로젝트에 유럽을 비롯한 많은 국가가 참여한 사실을 언급하면서 “이것이 미국이 다른 나라와 협력하면서 모두에게 이로운 진보를 만들어가는 방식”이라고도 했죠.
중국도 지지 않고 맞섰습니다. 양제츠 주임은 “미국은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면서 잘난 체 하려는 의도인 것 같은데, 그럴 자격이 없다”며 “중국 국민들은 그런 수법에 안 넘어간다”고 맞받았죠.
또 “우리가 서양 사람들 때문에 받은 고통이 덜했다고 보느냐”면서 “중국과 대화할 때는 미국의 실력에 맞게 하라”고도 했습니다. 미중 간 국력 차이가 과거와 달리 크게 줄었으니, 그에 맞게 대하라는 것이죠.
◇ 중, 회담 성과 어렵자 ‘국내 선전용 무대’로 활용
당초 중국은 이번 회담을 앞두고 일말의 기대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4월 기후변화 정상회의 때 미중 정상회담을 갖는 문제도 거론할 수 있을 것으로 본듯하구요. 그때문에 첫 회담 장소를 미국 영토인 알래스카로 잡는데 동의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회담 하루 전날 미국이 홍콩 문제와 관련해 중국과 홍콩 고관 24명을 제재하면서 사실상 이런 기대를 접은 것으로 보입니다.
평소 온건한 신사 이미지였던 양제츠 주임이 길거리에서 말싸움하듯이 맞선 건 이번 회담에 기대를 하지 않았다는 뜻이겠죠. 대신 이 회담을 지켜보는 자국 국민들에게 눈을 돌린 것으로 보입니다. 미국에 당당히 맞섰다는 이미지를 보여주려 한 거죠. 미국 측도 회담 후 양 주임의 발언에 대해 “중국 국내용”이라고 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회담이 끝나자마자 중국 관영매체들은 “속시원하게 말 잘했다”고 대대적으로 분위기를 띄우고 있죠. 역사적인 미중 회담 현장을 국내 선전용 무대로 잘 활용해 먹은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