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연방 하원이 12월8일 내년 국방정책과 예산 등을 포괄하는 ’2021년 국방수권법(NDAA)’를 통과시켰죠. 이번엔 화웨이, ZTE 등 중국 업체의 5G(5세대), 6G(6세대) 통신 기술을 사용하는 국가는 미군 배치를 재고하도록 하는 내용이 새로 들어갔습니다. LG유플러스가 화웨이 장비를 쓰는 우리나라도 무관하지 않은 일이죠.
화웨이에 대한 미국의 추궁은 참 집요합니다. 캐나다에 요청해 창업주 런정페이의 딸이자 재무담당최고책임자(CFO)인 멍완저우 부회장을 체포한 데 이어, 미국 기술과 장비를 이용하는 전세계 기업들이 화웨이와 거래를 못하도록 만들었죠. 세계 통신장비 시장 1위에 이어 스마트폰 1위까지 넘보던 화웨이는 반도체 등 핵심 부품 공급이 끊겨 사실상 고사 상태에 놓였습니다.
런정페이 회장이 “미국의 뜻은 우리를 바로잡겠다는 게 아니라 아예 때려 죽이겠다는 것”이라고 한탄할 만하죠.
◇광(光)통신시대 휩쓴 100년 전통 기업
미국이 이토록 반감과 경계심을 갖게 된 데는 계기가 있습니다. 바로 2009년 캐나다 통신장비업체 노텔(Nortel)의 몰락이죠.
노텔은 1895년 몬트리올에서 창업된 100년 전통의 기술기업입니다. 전화기를 발명한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1847~1922)과도 인연이 있는 기업으로, 벨 캐나다의 전화기 제조 자회사로 출발했죠. 1990년대 광통신시장이 열리면서 전성기를 맞습니다. 미국 루슨트테크놀로지와 함께 세계 통신장비 시장을 양분했고, 한때 시가총액이 3000억 달러에 육박했죠. 전세계 100여개국에 9만5000명의 직원을 둔 쟁쟁한 기업이었습니다.
이런 노텔이 닷컴 버블 붕괴 직후인 2001년부터 매출액이 곤두박질을 치다가 2009년엔 아예 파산했죠. 당시엔 화웨이 등의 저가 공세에 밀리고 시장 변화에 대응하지 못한 게 몰락의 원인이라는 시장 중심의 진단이 많았죠.
중국의 해커 군단과 산업 스파이에 당했다는 분석도 있었습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2012년 “중국 해커들이 10년 전부터 노텔을 공격했으며, 7명의 최고 경영진 아이디를 도용해 기술문서와 연구개발 보고서, 영업계획서 등을 대규모로 빼내갔다”고 보도한 적이 있죠. 하지만 이런 사이버 공격이 화웨이와 관련이 있는지, 실제 노텔 몰락의 원인이었는지 등이 분명하게 드러나진 않았습니다.
◇“해킹, 도청, 스파이 침투...전방위로 당했다”
올해 초에야 좀더 온전한 분석이 나왔습니다. 캐나다 일간지 내셔널포스트는 노텔의 전직 보안 담당 직원과 캐나다 정보당국, 학계 등을 폭넓게 취재해 올해 2월 노텔 몰락의 원인을 심층 보도했죠. 중국의 사이버 공격과 기술 절도, 산업 스파이 활동이 노텔 몰락의 주요 원인이었으며, 이것이 화웨이의 급부상으로 이어졌다는 내용입니다.
2004년 노텔의 한 영국인 직원은 자신이 회사 데이터베이스 ‘라이브링크’에 넣어둔 문서들을 광네트워크 담당 임원이 다운로드한 사실을 발견하죠. 그는 이 임원에게 메일을 보내 다운로드 사실을 확인합니다. 그런데, 이 임원은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답을 보내와요.
이때부터 노텔 보안 담당 직원들의 조사가 시작됐습니다. 조사 결과 프랭크 던 사장을 비롯한 고위 경영진 7명의 아이디가 해킹을 당했고, 지난 6개월 동안 1400건의 각종 문서가 도난당한 사실이 드러났죠. 해킹은 최소 2000년부터 시작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해커들의 인터넷 접속 주소는 모두 상하이에 있는 한 접속업체로 이어졌죠. 상하이에는 중국 군이 운영하는 ’61398부대'라는 해커부대가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 노텔 경영진은 이런 조사 결과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고 해요. 캐나다 정보기관인 보안정보국(CSIS)도 여러 차례 노텔 경영진에 경고를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고 합니다. 당시 CSIS 아태지역 책임자였던 마이클 주노-카쓰야는 “노텔 경영진에 중국의 조종을 받는 1~2명의 스파이가 있어서 우리의 경고를 중화시켜버린 것으로 판단한다”고 했어요.
캐나다 국방부는 2010년 노텔이 파산하면서 나온 오타와 연구개발 본부 건물을 사들였는데, 입주에 앞서 보안 점검을 해보니 도청장치들이 다수 발견됐다고 합니다. 2000년에는 화웨이 텍사스 사무소가 환불을 해달라고 가져온 노텔의 광통신접속 어댑터를 분석한 결과, 핵심 장치들을 대거 분해한 흔적이 발견된 적도 있다고 해요.
◇파산 뒤 기술 인력은 화웨이로 넘어가
이렇게 기밀이 통째로 노출되다보니 노텔은 국제 입찰전에서 화웨이에 연전연패를 거듭했고, 결국 2009년 파산했다는 게 내셔널포스트의 분석입니다. 파산한 뒤에 해고된 노텔의 기술 인력들은 화웨이가 거둬갔죠.
중국 해커들이 빼내간 정보가 화웨이에 넘어갔다는 명확한 증거가 나온 건 아닙니다. 화웨이도 “근거없는 얘기”라고 펄쩍 뛰고 있죠.
하지만 미국이나 캐나다는 중국 군이 주도해 탈취한 노텔의 기술 정보와 개발 정보가 화웨이에 고스란히 넘어간 것으로 확신하고 있는듯합니다. 민간기업인 화웨이를 사실상 중국군과 연결된 국영기업이라고 보는 것도 바로 이때문이죠.
미국과 캐나다로서는 100년 전통의 세계적인 기업이 중국의 산업 스파이 작전에 당해 파산하고, 기술 인력까지 줄줄이 뺐겼다는 게 믿기지 않았을 겁니다. 가혹해보이기까지 하는 화웨이 제재의 뒤에는 이런 쓰라린 경험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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