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뜬금없이 한중 언론 간에 김치 표준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11월24일 중국 쓰촨성 서남부 메이산(眉山)시의 특산품인 ‘쓰촨파오차이(四川泡菜)’가 국제표준화기구(ISO)로부터 국제 표준 인증을 받았죠. 파오차이가 곧 김치이니 중국 김치가 세계 표준이 된 게 아니냐는 논란이 일어난 겁니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환구시보라는 중국 관영 매체의 교묘한 짜집기 보도에 따른 한바탕의 해프닝이었어요. 파오차이와 한국 김치는 전혀 다른 음식입니다.
◇김치(Kimchi)와 파오차이(Pickles)는 다른 음식
파오차이라는 말은 ‘소금에 절인 채소’라는 뜻입니다. 절인 채소는 어느 나라에나 있죠. 중국 요리하면 늘 따라붙는 자차이(榨菜)도 소금에 절여 만듭니다. 프랑스 오이피클, 독일 자우어크라우트도 마찬가지죠.
김치도 절인 배추나 무우 등을 사용합니다. 하지만 고추가루와 마늘, 생강, 쪽파, 액젓, 찹쌀풀 등을 넣어 만든 양념이 결정적인 차이를 만들죠. 중국 최대 포털인 바이두(百度)의 백과사전은 “김치는 재료가 파오차이와 같은데, 특징적인 것은 매운 고추를 더해 맛이 달라진다는 점”이라며 “한국 선조들은 고추를 이용해 세계 식품 중 위대하고 중대한 김치를 창조해냈다”고 씁니다.
파오차이나 김치는 모두 중국어로 파오차이라고 하죠. 이렇게 같은 명칭을 사용하는 데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김치는 중국인 중에도 좋아하는 이들이 많은데, 자신들도 김치와 파오차이가 다른 음식이라는 걸 잘 압니다.
그래서 김치와 파오차이를 구분해서 부르려고 해요. 파오차이는 그냥 파오차이라고 하고, 김치는 ‘한국파오차이(韓國泡菜)’ 또는 ‘매운배추(辣白菜)’ 등으로 부릅니다.
바이두 백과사전도 엄격하게 구분하죠. 김치는 ‘한국파오차이’라고 하고, 쓰촨파오차이와 다른 표제어로 다룹니다. 영어 명칭도 김치는 ‘Kimchi’로, 쓰촨파오차이는 ‘Pickles, Sichuan Style’이에요.
◇원래 보도는 김치 언급 없어
이번 논란의 시작은 중국시장감독관리총국 기관지 중국시장감관보의 11월26일자 보도입니다. 쓰촨파오차이가 ISO의 국제 표준 인증을 받아서 국제시장에서 지명도가 높아질 것이라는 내용이에요.
ISO는 비정부기구로 누구나 표준 신청을 할 수 있고, 인증을 받으면 국제시장 마케팅에 도움이 돼죠. 메이산시도 이런 맥락으로 신청서를 냈고, 그 결과 ISO 24220<파오차이(염장발효채소) 규격 및 시험방법> 국제표준이 제정된 겁니다. 여기까지는 문제가 없어요. 이 보도는 김치를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ISO 인증문서에도 ‘이 표준은 김치에 적용되지 않는다’고 돼있죠.
문제는 환구시보가 이 보도를 인용해 기사를 쓰면서 ‘한국 김치의 굴욕’이라는 자극적인 제목을 단 겁니다. 환구시보는 이 제목을 뒷받침하기 위해 2가지 근거를 내세웠는데, 그 중 하나는 표준 심사 과정에 한국 전문가가 참여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인증 심사에는 중국과 터키, 이란, 인도, 세르비아 등의 전문가들이 참여했다고 합니다. 피클 표준 만드는데 김치 전문가가 참여하지 않았다는 게 특별히 이상해 보이지 않는데, 환구시보는 유독 이 점을 강조해요.
또 하나는 2017년 한국의 김치 무역적자가 사상 최대인 4728만 달러를 기록했다는 연합뉴스의 2018년 보도입니다. 이 기사는 “한국에서 소비되는 김치의 35%가 외국에서 수입되는데, 수입 김치의 99%는 중국에서 온다”고 하면서 ‘김치 종주국 굴욕’이라는 제목을 달았죠. 그런데 김치 무역적자 때문에 굴욕이라는 것이지, 파오차이가 표준 인증을 받아서 굴욕이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쓰촨식 피클 표준 인증받은 걸 김치 표준 인증받은 것처럼 왜곡하고, 여기에 김치 무역적자를 다룬 2년전 한국 보도를 붙여 얼토당토않은 짜깁기 보도를 한 겁니다. 여기에 한국 매체들이 발끈한 거죠.
◇중국인 피해의식 자극해 돈벌이
중국이 이런 시비를 건 것은 한두번이 아닙니다. 2005년 강릉단오제가 유네스크 문화유산으로 지정됐을 때도 ‘중국 단오를 훔쳐갔다’고 난리를 피웠죠.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건 단오가 아니라 단오를 전후해 강릉에서 행해지는 제례 의식인데 말입니다.
원로 중국 외교관인 우젠민(吳建民·1936~2016) 전 프랑스 대사는 2010년 한 TV강연에서 중국인의 이런 행태를 ‘지난 100년간 약한 나라로 지내오며 형성된 피해의식’이라고 분석한 적이 있어요.
이런 피해의식을 자극해 돈을 버는 곳이 바로 환구시보입니다. 그 덕분에 국제뉴스 일간지인데도, 발행 부수가 200만부 전후에 이르고 광고 수입도 짭짤하다죠. 환구시보의 엉뚱한 보도가 하루이틀의 일은 아니지만, 이번에는 그 실체가 제대로 드러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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