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와 국경 지대에서 무력 충돌을 겪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중재로 평화 협정을 맺은 태국이 군사 작전을 계속하겠다고 선언했다. 9일 니콘뎃 팔랑꾼 태국 외교부 대변인은 “캄보디아가 10월 체결한 평화 협정을 유린했다”면서 “앞으로 어떤 협상도 하지 않겠다”고 했다. 앞서 7일 양국이 전투기 등을 동원해 교전을 재개한 지 사흘 만이다. 평화 협정이 사실상 파기되면서 국경 지대에선 40만명 이상의 민간인이 피란길에 올랐다.
트럼프 대통령이 평화 협상을 중재했던 세계 분쟁 지역 곳곳에서 다시 총성이 울리고 있다. “8개의 전쟁을 끝냈다”는 자평과 달리 국제사회에선 ‘트럼프식 평화 협정’이 갈등의 근본적 해결이 아닌 단기적 봉합에 그쳤다는 비판이 커지고 있다.
◇’전쟁 끝났다’던 곳곳에서 파열음
지난 7월 일부 국경 지대 영유권을 놓고 무력 충돌을 벌인 태국과 캄보디아는 트럼프가 “두 국가와 관세 협상을 중단하겠다”며 휴전을 촉구하자 닷새 만에 교전을 멈췄다. 이후 간헐적 충돌을 이어 가던 양측은 10월 아세안(ASEAN·동남아시아국가연합) 정상회의가 열린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트럼프와 함께 휴전 협정문에 공동 서명했다.
그러나 지난달 캄보디아군이 매설한 지뢰에 태국군 2명이 중상을 입자 태국은 휴전 협정을 이행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7일 교전 재개 이후 양측은 서로 상대가 먼저 공격해 협정을 위반했다고 주장했다. 캄보디아는 태국군이 공격했으나 보복하지 않고 사격 중단을 요청했다고 밝혔고, 태국군은 캄보디아군이 동부 국경에서 공격을 시작해 교전 규칙에 따라 대응했으며 교전이 34분 만에 종료됐다고 했다.
콩고민주공화국(민주콩고)과 르완다의 휴전도 8일 좌초 위기를 맞았다. 지난 4일 트럼프가 양국 대표단을 백악관으로 초청해 평화 협정 체결식을 열어준 지 나흘 만이다. 펠릭스 치세케디 민주콩고 대통령은 이날 “투치족 반군 ‘M23’이 공격을 단행했다”며 “르완다가 약속을 위반했다”고 비난했다. M23은 르완다 정부의 지원을 받는다고 알려진 무장 단체다.
트럼프가 가장 공을 들였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무장 단체 하마스의 전쟁도 단계적 휴전 이행이 불투명한 상황이다. 1단계로 합의한 인질 전원 석방과 사망자 유해 반환 등은 거의 완료됐지만, 2단계 논의의 핵심 쟁점인 하마스 무장 해제를 두고 양측은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 이스라엘은 하마스의 완전 무장 해제를 주장하는 반면, 하마스는 ‘일정 기간 무장 동결·보관’이 최선이라는 입장이다. 가자지구에선 산발적 교전이 계속되고 있다. 지난달 20일에는 이스라엘이 가자지구 전역에 대규모 공습을 단행해 어린이·여성 등 32명이 사망했다.
◇“‘거래된 평화’로 갈등 종식 어려워”
국제 사회에선 ‘거래’에 가까운 트럼프의 중재 방식에 대한 회의론이 확산하고 있다. 트럼프는 관세 조정이나 투자·원조 약속 등 경제적 압박과 보상을 앞세워 분쟁 당사국을 협상 테이블로 이끌어냈다. 이런 방식이 영토·민족·종교 등 복잡한 요인이 최소 수십 년씩 뒤얽힌 분쟁을 안정적 평화 체제로 전환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영국 싱크탱크 채텀하우스의 사미르 푸리 글로벌 거버넌스·안보센터 소장은 스카이뉴스에 “트럼프의 접근법은 철저히 거래적(transactional)”이라며 “경제적 유인을 제시해 총성을 멈출 수는 있지만, 수십 년 이어진 정치·역사적 갈등 구조를 해소하는 것과 단기적 충돌 중단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라고 했다.
예컨대 지난 4월 파키스탄 무장 단체의 총기 테러로 인도인 26명이 사망하면서 충돌했던 양국은 카슈미르 지역 영유권과 종교·인종 문제 등으로 반세기 이상 대립해 왔다. 트럼프의 중재로 5월 휴전에 합의했지만 지난달 양국 수도에서 하루 간격으로 폭탄 테러가 발생해 최소 20명이 숨지자 양측은 다시 상대를 배후로 지목하며 비난을 주고받고 있다.
트럼프가 최근 밀어붙이고 있는 우크라이나·러시아 종전 협상 역시 미봉책에 불과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앞서 미국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점령지 영유권 인정, 우크라이나 병력 축소 등 러시아에 일방적으로 유리한 ‘28조(條) 평화안’을 제시해 논란을 낳았다. 세바스티안 셰퍼 도나우·중앙유럽연구소장은 “(편향적 중재안으로) 교전을 멈춘다 해도 재충돌 위험이 상존하는 ‘동결된 분쟁’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트럼프식 평화 협상이 전혀 효과가 없지는 않다는 평가도 나온다. 지난 8월 백악관에서 평화 협정에 서명한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은 구소련 붕괴 전부터 갈등을 빚다가 트럼프의 중재로 관계 정상화에 합의했다. 일함 알리예프 아제르바이잔 대통령, 니콜 파시냔 아르메니아 총리는 양국을 잇는 교통로 개발 권한을 미국에 일임하고 이 길을 ‘국제 평화와 번영을 위한 트럼프 루트’로 명명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