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기 트럼프 행정부가 등장한 후 유럽에서 미국 핵(核)우산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는 가운데 프랑스 핵무기의 역할 확대에 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지난 2월 말 백악관에서 있었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사이의 설전(舌戰) 이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회원국들 사이에는 유사시 미국으로부터 버림받을 수 있다는 위기감이 확산되어 왔다. 그런 가운데 3월 초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독일·폴란드 등 나토 동맹국들에게 핵우산을 제공하겠다”며 핵무기 투발(投發)용 라팔 전투기 40대를 추가 도입하겠다고 발표했다.
넉 달 뒤인 7월 10일, 마크롱 대통령과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는 나토 해군작전사령부가 위치한 런던 근교 노우드에서 만나 앞으로 핵무기 협력을 강화해 가겠다고 발표했다. 2010년 핵협력을 위해 체결했던 랭카스터 하우스 협정을 업그레이드해 양국 간 핵조율 그룹(Nuclear Steering Group)을 출범시키기로 한 것이다. 이는 사실상 유럽 독자적인 핵우산을 준비하려는 노력에 시동을 건 조치로 해석되고 있다.
독자적인 핵억지력 구축해 온 프랑스
현재까지 나토 회원국들 사이에서는 영국보다는 훨씬 독자성이 확보된 프랑스 핵우산에 기대가 모아지고 있다. 영국은 프랑스와 달리 1952년 핵무장 당시부터 대미(對美) 의존형 체제를 유지해 왔기 때문이다. 핵억지력의 기반인 잠수함 발사 핵미사일(트라이던트 II D-5)도 탄두부만 제외한 미사일 전체와 발사 통제 장치를 미국제를 사용해 왔다. 그 정비도 미국 조지아주에 있는 킹스베이 잠수함기지에 맡겨 왔다.
하지만 프랑스는 1950년대 말 핵무기 개발 초기부터 훨씬 독자적인 핵무기 체제를 발전시켜 왔다. 핵억지력의 기반으로 전략 핵잠수함 체제(4척)뿐 아니라 공중에서 핵미사일을 발사하는 라팔 전투기 체제(현재 50대)도 함께 보유해 왔다. 잠수함 전력에만 의존해 온 영국보다 신뢰할 수 있는 다양한 핵억지력을 유지해 온 것이다.
영국 정부도 지난 6월 말 헤이그에서 열린 나토 정상회담에서 몇 해 안에 핵무기 탑재용 F-35 전투기 12기를 미국에서 도입한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그동안 영국이 재정난 가운데 신형 핵잠수함 도입 사업을 계속 지연시켜 온 사정 등을 볼 때, 나토 회원국들 사이에서는 프랑스와의 핵우산 관련 협의가 더 관심을 끌어 왔다.
프랑스와 영국의 핵무기가 어느 정도까지 미국의 핵무기를 대신해 러시아를 견제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아 있다. 하지만 이미 일본이 확보한 산업용 핵연료 확보기술(잠재적인 핵무장 능력)도 그동안 미국의 반대로 확보하지 못해 온 우리 입장에서는 그동안 프랑스가 어떤 과정을 거쳐 독자적인 핵역량을 길러 왔는지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4공화국 시절부터 핵개발 시작
프랑스에서 본격적인 핵무장을 시작한 지도자는 1958년 제5공화국을 출범시킨 샤를 드골 대통령이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중 런던에서 망명정부를 이끌었던 그는 1944년 연합군이 파리를 탈환한 후 임시정부 수반으로 프랑스를 이끌었지만, 1946년 선거에서 좌파연합이 승리하자 권좌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이 짧은 집권 기간중에도 그는 1945년 가을 프랑스 원자력위원회(CEA)를 출범시켰다.
1958년 재집권 이후 드골이 강력한 지도력으로 핵무기 개발을 실현하기는 했지만, 이는 그가 야인(野人)으로 물러나 있던 제4공화국 기간 동안 축적된 기술적 기반과 정치적 결정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 제3공화국 시절처럼 내각책임제를 유지했던 제4공화국 당시에도 빈번한 내각 교체 등으로 한계가 있었지만, 공산주의자들을 제외한 거의 모든 분야의 엘리트들이 백방으로 핵기술 확보를 위해 부심(腐心)하고 있었다. 정계와 군부, 기술관료, 과학자 및 전직 정보 관계자들 사이에 핵무기를 보유해야 한다는 인식이 시대정신으로 확산돼 있었던 것이다.
1954년 5월 외무장관직을 겸하고 있던 피에르 망데스 프랑스 총리는 미국이 나토 안의 미국 핵무기 공유 체제에 참여하라고 권유하자 이를 즉각 수용했다. 동시에 그는 내각 결정으로 독자적 연구를 통해 핵무장 할 수 있는 기반을 갖추기로 결단했다. 온건 좌파인 급진당 소속이었던 망데스 프랑스는 취임 직후 프랑스군이 디엔 비엔 푸 전투에서 항복하는 바람에 베트남 식민지를 포기하고 철수하는 작업을 맡아 고전하고 있던 참이었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 당시 전투기 조종사로 레지스탕스 활동에 가담했던 그가 최첨단 무기체계였던 핵전력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프랑스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점령하에 있었기 때문에, 영국처럼 미국의 원폭 개발(맨해튼 프로젝트)에 과학자들이 참여하지 못했다. 하지만 1930년대부터 원자력 분야의 과학적 기반은 축적해 오고 있었다.
다만, 드골이 정계에서 은퇴해 있던 제4공화국 12년 동안 프랑스는 핵개발 의지를 국가적 프로젝트로 추구할 역량이 부족했다. 이 시기 프랑스는 강대국으로서 면모를 상실해 가고 있었다. 미국 마셜 플랜의 지원으로 전후(戰後) 복구를 이뤄 가는 가운데, 1954년 봄에는 8년 가까운 식민지 회복 전쟁에도 불구, 호찌민이 이끄는 공산 베트민군에 패배했다. 뿐만 아니라 130년 동안 ‘프랑스의 일부’로 인식돼 온 알제리 식민지에서도 같은 해부터 민족해방전선(FLN)의 저항이 확산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1956년 수에즈 사태가 벌어졌다. 가말 압델 나세르 이집트 대통령이 수에즈 운하를 전격 국유화하자 영국과 프랑스 양국은 비밀작전으로 공수부대를 투입해 운하 관리권을 되찾으려 나섰다. 하지만 유럽 제국주의의 부활을 허용하면 중동(中東) 일대에 공산주의가 침투하게 될 것을 우려한 미국은 경제적 압박으로 영·불 양국군이 철수하도록 만들었다.
이 같은 사태들로 인해 프랑스 지도자들 사이에 미국에 대한 불신(不信)이 고조됐다. 미국이 1954년 디엔 비엔 푸 기지가 베트민군에 포위됐을 때 프랑스 측의 공군력 지원 요청을 거부했던 것이나, 더 앞서 1940년 6월 파리 함락 때 이전에 약속했던 군용기 2000여 대의 판매를 지연시켜 패배를 방치했던 아픈 기억도 상기되었다.
수에즈 사태 직후인 1956년 말, 프랑스 사회당(SFIO) 당수 귀 몰레 총리는 원자력위원회와 군부에 “원자력 기술을 무기화하도록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1958년 4월에는 레지스탕스 운동을 했던 급진당 소속 펠리스 가야르 총리가 1960년에 첫 핵실험을 실시할 수 있도록 준비하라고 명령했다.
드골, 케네디의 ‘유럽공동핵군’ 구상 반대
1958년 봄부터 알제리 사태를 둘러싸고 정치 위기가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자 ‘구국의 영웅’ 드골 장군이 정계에 복귀하게 됐다. 알제리 주둔 프랑스군이 알제리 독립 허용에 반발해 쿠데타 움직임을 보이자, 의회는 6월 초 드골 장군을 난국을 풀어 갈 유일한 지도자로 지목하고 그를 임시총리로 추대했다. 드골은 대통령 중심제로의 개헌(改憲)을 조건으로 총리직을 수락했다. 드골은 9월 중 국민투표를 통해 새 헌법에 대한 지지를 확보하고 그해 12월 제5공화국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탈(脫)식민화라는 세계적 추세를 거스를 수 없다고 판단한 드골은 압도적 카리스마로 현지 정착민과 군부의 반발을 잠재우며 알제리 독립을 허용하는 과정을 주도해 국가적 위기를 수습해 갔다. 동시에 독자적인 핵무기 개발을 최우선 국정 과제로 추진하면서, 미소(美蘇) 양극(兩極) 체제에 안주하지 않고 프랑스의 독자적인 역할을 확보해 가는 자주외교에 박차를 가했다.
드골은 먼저 영국처럼 미국의 지원 아래 핵무기를 개발하라는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의 권유를 거절했다. 1961년 케네디 정권이 등장한 후에는 ‘유럽공동핵군(MLF)’을 도입해 서유럽에 미국 주도의 핵질서를 정착시키려는 시도에 반대했다. 드골은 줄곧 미국의 핵패권(覇權) 추구에 반대하며 독자 핵무장에 박차를 가했다. 독자적인 핵주권을 확보하기 위해 그동안 독일·이탈리아와 유지해 온 핵기술 협력도 중지시켰다.
프랑스의 국제적 위상에 대한 통찰 작용
핵개발 일선의 과학자와 기술인력들에 대한 격려를 아끼지 않은 드골은 핵탄두뿐 아니라 미사일·전폭기·잠수함 등 핵 운반 수단과 핵 사용 독트린 개발까지 대통령실이 직접 챙기면서 핵개발을 독려했다. 덕분에 프랑스는 1960년 2월 알제리 사하라 사막에서 최초의 원폭 실험에 성공했고, 이후 1966년까지 대기권 핵실험과 지하 핵실험을 알제리에서 계속했다.
1962년 알제리 독립을 허용하기 이전 프랑스는 핵실험 권리를 확보해 뒀지만, 중동 및 아프리카 국가들과 일본·소련 등 각국의 비판이 계속됐다. 그러자 프랑스는 태평양의 프랑스령(領) 폴리네시아의 무르오아, 팡가토파 환초(環礁)로 실험 장소를 옮겨 전술 핵탄두와 수소폭탄을 개발하기 위한 대기권 핵실험을 1974년까지 계속했다.
드골이 고집스럽게 독자적 핵개발을 추구한 데는 전략적 상황 인식과 프랑스의 국제적 위상에 대한 통찰력이 함께 작용했다. 현역 장교로 1차 세계대전 당시 힘겨운 승리와 2차 세계대전 초기 독일군에 당했던 패배를 모두 경험한 드골은 전략적인 독립성을 확보하지 않으면 프랑스의 안보뿐 아니라 ‘위대함(Grandeur)’도 회복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임에도 불구하고 2차 세계대전 이전처럼 미국과 영국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고 본 것이다.
자주적 국방력을 확보하지 못하면 정치·사상·문화 면에서 세계 표준의 규범과 모델을 제시해 온 프랑스 문명의 독자적 역할도 지속될 수 없다고 드골은 인식했다. 이미 1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프랑스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앵글로색슨계(系)인 영·미 두 나라가 세계 정치와 경제, 문화까지 모두 지배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경계심이 확산돼 있었다. 드골은 독자 핵무장을 통해 그같은 사태를 방지하려 한 것이다.
미국의 핵전략 변화
1960년대 미국의 핵전략 변화는 드골이 핵무장에 박차를 가하게 만든 직접적인 배경이 됐다. 1950년대 아이젠하워 대통령 당시 미국은 소련에 비해 압도적인 핵전력 우위에 기초해 재래식 전쟁 등 모든 종류의 도발에 대해 핵무기로 보복한다고 위협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전쟁 발생 자체를 억제하고 국방비도 아낀다는 ‘대량보복(Massive Retaliation)’ 전략이었다. 하지만 1957년 스푸트니크 인공위성 발사 성공으로 소련의 핵무력 고도화가 가시화되자 그런 전략은 현실성을 상실했다.
1961년 출범한 케네디 정권은 이른바 유연 대응(Flexible Response) 전략을 도입했다. 이는 공산 진영의 도발에 단계적으로 재래식 전력을 사용한 대응부터 시작해 저(低)위력 전술핵 정도로 대응하면서 확전(擴戰)을 방지하겠다는 것이었다. 전쟁을 유럽 지역 안으로 최대한 한정함으로써, 개전(開戰)과 함께 미소 양국이 상대방 본토의 대도시를 핵무기로 타격하는 것을 막으려는 노력이었다. 이를 보면서 프랑스는 미국이 전쟁 제한에 주력하다 보면 프랑스가 존망(存亡)의 기로에 처해도 미국이 핵무기 사용을 주저하게 될 것이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드골은 1961년 5월 케네디와 가진 정상회담에서, 미국의 최대 관심사는 자국(自國) 도시들이 소련의 핵공격에 노출되지 않도록 하는 데 있다는 인식을 굳혔다. 1962년 10월 쿠바 미사일 위기 때 케네디 정부가 위기 대응을 ‘협의’가 아닌 ‘통고’ 방식으로 진행하는 것을 보면서 드골은 대미(對美) 불신을 더욱 다지게 됐다. 군사 전략가였던 드골은 재래식 전력에서 압도적이던 소련군이 프랑스 국경 수십km 이내의 라인강까지 진격해 와도 미국은 무시할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드골은 “라인강의 강폭은 대서양보다 훨씬 좁다”면서 “미국은 파리를 보호하기 위해 뉴욕을 소련 핵공격에 노출시키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드골, 나토 통합사령부 탈퇴
일단 기본적인 전략 핵무기 개발에 성공한 후 프랑스는 1966년 나토 통합사령부에서 탈퇴하면서 자국 내에 주둔해 있던 미군 등 다른 나토 회원국 군대의 철수를 요구했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드골은 나토와 군사 협의는 계속 유지하면서 실질적인 협력이 가능하도록 했다. 다만, 핵무기에 관해서는 나토 핵기획 그룹(NPG) 참여를 거부하면서 단호하게 독자 노선을 유지했다.
드골은 국방비의 대부분을 핵개발에 투입하면서 독자적인 외교 노선을 추구했다. 먼저 서독과의 관계를 개선해 나가면서 영·미가 주도하는 앵글로색슨 세력이 서유럽 방위에서 주도권을 확보하는 것을 막으려 노력했다. 동시에 소련·중국(중공) 등 공산권 외교에도 나서면서 미소 양극 간 대결 구도를 타파하며 제3의 노선을 추구하려 했다. 영국이 미국에 밀착했다고 보아 영국의 유럽공동체(EC) 가입을 반대했으며, 미 존슨 행정부의 베트남전 개입 확대도 비판했다.
미국은 프랑스의 그런 행보를 양차 세계대전 때 프랑스를 구해 준 미국에 등을 돌린 ‘배은망덕’한 행위로 인식했다. 미국 입장에서 보면 드골이 핵개발에 국방 예산을 집중할 수 있었던 것도 미군이 서독을 방어해 주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드골의 독자 노선 추구가 최고치에 이르자 미국 내에서는 ‘고집불통 노(老)장군’이 수명을 다해 세상을 떠나기만 기다리는 분위기로 돌아서게 된다.
드골의 지도력은 1968년 5월 권위주의 통치에 반대하며 대학 자유화를 요구하는 68 데모 사태에 근로자들이 파업으로 동참하면서 위기를 맞게 됐다. 드골은 다음 해 봄 개혁안을 만들어 국민투표로 재신임을 물었지만 민심의 이반(離反)을 극복하지 못하고 패배하자 즉각 사임했다. 그는 1970년 11월 80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드골, 소련의 체코 침공 이후 노선 변환
사실 프랑스의 군사전략은 드골 집권 말기인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사태를 계기로 현실적인 노선으로 전환하기 시작했다. 소련이 이끄는 바르샤바조약기구(WTO)군 전차부대들이 그해 봄부터 자유화 운동을 벌이던 체코슬로바키아를 전격 침공, 두브체크 정권을 축출한 데 충격을 받은 것이다. 이 사태는 소련의 핵전력이 미국에 필적할 정도로 발달한 가운데 WTO군이 압도적인 재래식 전력으로 밀어붙이면 서독뿐 아니라 프랑스 안보도 위협받을 수 있음을 생생하게 보여 줬다. 이때부터 프랑스의 군사전략은 유럽 주둔 미군을 포함한 나토 각국 군대와 공동작전을 위한 협력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실용적 색채를 더해 가게 됐다.
사임 직전 드골은 대미 관계에서 큰 전기(轉機)를 맞이했다. 1969년 1월, 역대 미국 정권들 가운데 가장 드골 식 외교 노선에 이해를 표시한 리처드 닉슨 행정부가 출범했기 때문이다.
닉슨 대통령은 진작부터 미국 정계에서는 드물게 프랑스의 국위(國威)를 회복하기 위해 드골이 기울여 온 노력에 이해를 표시해 온 정치가였다. 닉슨의 현실주의적 외교 구상을 높이 평가한 드골도 1960년 대선에서 케네디에게 패한 후 정치적으로 외로운 처지이던 닉슨을 1961년 3월 엘리제궁에 초대해 환대했다. 그 후로도 드골은 닉슨이 유럽을 방문하면 환대하면서, 미중 관계 개선 등을 권유하고 나토 및 대소(對蘇) 정책 등에 대해 의견을 교환하며 유대를 다졌다. 1968년 닉슨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드골은 이듬해 2월 닉슨을 국빈으로 초대해 대대적인 환영 행사를 베풀었다.
키신저의 ‘제한적 핵전쟁’ 구상
닉슨 행정부의 국가안보보좌관으로 발탁된 헨리 키신저(1923~2023년)는 프랑스에 핵무기 기술 지원을 제공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는 1950년대 초 하버드대 교수 시절부터 저위력 핵무기로 주로 군사 시설들만 공격하는 제한적인 핵전쟁도 대소련 전략의 일환으로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전면 핵전쟁만 상정하고 준비하는 것은 수천만 명의 민간인들을 볼모로 잡는 전략이어서 현실적으로 대통령이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이 사라진다고 본 것이다.
세계정세를 보는 시각에서도 키신저는 1960년대 말에는 이미 중소(中蘇) 대립으로 공산권이 분열됐고 미국의 국력도 상대적으로 저하된 만큼, 다극적(多極的)인 세력 균형 체제가 등장했다고 파악했다. 그는 2차 세계대전 후 경제력을 회복한 서유럽과 일본 등 우방국들이 적극적으로 대소련 봉쇄정책에 기여하도록 유도함으로써 미국의 국방비 부담을 줄여 나가려 했다. 이 같은 정세 인식 아래 키신저는 이미 핵무장 국가로 등장한 프랑스 핵무기의 신뢰도를 높일 수 있도록 기술 지원을 제공함으로써 대소련 핵억지에 도움을 받으면서 프랑스와 나토의 협력도 유도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키신저의 이 같은 구상은 닉슨 대통령의 전폭적 지지 아래 추진되기 시작했다.
대외 전략에서 한 팀으로 움직인 닉슨과 키신저는 집권 이후 새로운 핵전쟁 교리를 도입하려 했다. 앞서 1960년대 케네디-존슨 행정부도 ‘유연 대응 전략’을 도입해 최대한 유럽 지역 안으로 전쟁을 제한한다는 교리를 마련했지만, 그 전략도 결국에는 미소 양국 간 전면 핵전쟁을 상정해야 한다는 한계가 있었다.
슐레진저 독트린
키신저의 제한적 핵전쟁 구상을 새로운 전쟁 교리로 구체화시킨 인물은 제임스 슐레진저 국방장관이다. 하버드대 경제학 박사 출신으로 1971년 8월부터 핵무기와 원자력을 관리하는 원자력에너지위원회 위원장으로 일하던 그는 1973년 5개월 동안 CIA 국장을 역임한 후 국방장관에 취임했다. 슐레진저는 키신저의 제한적 핵전쟁 구상을 최신 군사 기술을 반영해 집행 가능한 군사전략으로 입안했다.
‘슐레진저 독트린’으로 불린 이 전략은 먼저 공산권의 재래식 공격 등으로 방어선이 무너질 조짐이 있을 경우, 나토군은 주로 군사 목표물들에 대한 저위력 핵무기 공격으로 대응하도록 했다. 그러면서 확전 과정을 압도적으로 지배할 수 있는 전쟁 능력으로 기선을 제압함으로써 상호 대도시에 대한 파멸적 공격에 돌입하기 전에 협상을 통해 전쟁을 종결시킨다는 방안이었다. 또 소련 측에서 ‘미국이 실제로 사용 가능한 교리’라고 믿게 만듦으로써 도발 자체를 방지한다는 구상이기도 했다.
이를 위해서는 미국과 동맹국들이 핵전쟁의 확전과 완화(escalation control)에서 우위를 확보할 수 있게끔 정확하고 다양한 핵무기 체계를 개발하고, 각종 지휘센터나 비행장 등 군사 시설을 공격 목표들로 정교하게 준비해 두는 작업이 필요했다.[〈미 국가안보 결정문서(NSDM) 242〉 및 1975년 슐레진저 국방장관 의회 보고서]
키신저와 슐레진저는 이 같은 새로운 제한적 핵전쟁 교리를 입안하면서 프랑스의 핵무기도 대소 억지력 강화에 기여한다고 보았다. 특히 바르샤바조약군 침공시 프랑스가 저위력 전술핵으로 응전해 주면 핵전쟁을 유럽 지역에 한정하면서 유리하게 휴전을 달성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다. 평화시에도 우방국 프랑스의 독자 핵무력은 소련의 계산을 복잡하게 만들게 되므로 전쟁 발발을 억지하는 데 기여하는 바가 적지 않았다.
때문에 키신저와 슐레진저 두 사람은 미국 정부 내 일부 반대에도 불구, 프랑스 핵무기의 정확도와 신뢰성을 높이도록 지원하면서 나토 차원의 공동 핵기획에 프랑스도 영국처럼 참여토록 유도하려 한 것이다.
미-프랑스 핵기술 협력
닉슨 행정부의 새로운 핵전략은 프랑스 측이 기본적인 핵무장에 성공한 후 한창 핵능력 고도화에 부심하던 시기에 수립되고 있었다. 프랑스는 이미 확보한 기본적인 핵무기(공중 투하 핵폭탄, 대도시 공격용 전략 핵미사일)뿐 아니라, 지대지(地對地) 전술 핵미사일 개발에 나서고 있었다. 또 1971년 배치한 잠수함 발사 핵미사일의 다탄두화(多彈頭化)를 통해 소련의 방공망(防空網)을 뚫고 돌입하는 능력을 신속히 확보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닉슨 행정부는 프랑스의 사정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먼저 CIA가 닉슨 행정부 출범 직후인 1969년 2월 실시한 유럽 정책 검토 과정에서 “프랑스 정부 안에 미국의 핵기술 지원을 바라는 목소리가 있다”고 보고했다. 곧이어 2월 말 파리에서 가진 드골과의 정상회담 도중 닉슨은 “프랑스의 핵무기는 미국에도 도움이 된다”는 시각을 조심스럽게 피력했다.
하지만 드골은 정상회담 두 달 후 국민투표에서 패배해 4월 28일 사임했다. 그러자 키신저 보좌관이 4월 30일 핵기술을 이전하면서 나토에 대한 프랑스의 협조를 유도하는 방안을 검토하라고 지시하게 된다.[《미국외교문서집(FRUS) 1969-1972》, XLI, 468~469쪽]
프린스턴대의 리처드 울먼 교수는 미국과 프랑스 두 나라 인사들과 80여 차례에 걸친 인터뷰를 통해 미국-프랑스 핵기술 이전에 대해 밝혀 낸 후, 이를 1988년 외교 전문 저널 《포린 폴리시》에 처음으로 공개했다. 그 후 미국 국가안보사료관(National Security Archive)의 윌리엄 버 박사와 프랑스 전략연구재단(FRS)의 브루노 테르트레 부소장이 관련 연구들을 발표해 왔다. 2014년 미 국무부가 발간한 외교문서집에도 그 과정이 일부 공개됐다.
드골 집권 당시 총리였던 조르주 퐁피두 대통령은 1970년 말 닉슨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석상에서 “두 나라 핵무기의 공격 목표 설정에서 중복을 막아야 한다”며 일반적인 핵협력의 필요성만 제기했다. 하지만 다음 해 3월부터 두 나라 국방·기술 당국 간에 실질적인 핵기술 협력이 시작됐다.
네거티브 가이던스
테르트레 부소장 등의 연구에 따르면, 1970년대 초 퐁피두 집권 당시에 미국은 탄도미사일 개발을 지원하면서, 핵폭발 시뮬레이터를 판매해 운용 기술을 이전했다. 또 탄도미사일이 대기권에 진입할 때 발생하는 고열로부터 핵탄두를 보호하는 기술과 지하 핵미사일 발사대(사일로) 건설 기술, 소련 측의 탄도미사일 방어시스템(ABM) 관련 정보 등도 이전했다. 이와 함께 1973년에는 수소폭탄 설계 관련 기술도 일부 이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기술이전 방식으로는 직접이전 방식이 아니라 ‘네거티브 가이던스’ 방식이 활용됐다. 프랑스 측이 난관에 부딪친 기술 현안들에 대해 상세한 질문서를 가져와 문의하면 미국 측이 어느 방식이 맞는지를 ‘가부(可否)’로만 알려주는 방식이었다. 핵무기 관련 기술 이전을 금지한 미 국내법 위반과 의회의 반발을 초래하지 않기 위해 택한 방식이었다.
두 나라 사이의 핵기술 협력은 1973년 말 키신저의 ‘유럽의 해(Year of Europe)’ 연설로 양국 관계가 소원해지면서 잠시 정체기(停滯期)로 들어가기도 했다. 키신저의 연설은 나토 동맹국들이 독자적인 외교안보 노선을 추진하기보다 미국의 세계전략에 부응하는 정책을 유지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는데, 드골주의에 충실한 퐁피두 정권이 여기에 반감을 표시한 것이다. 같은 해 10월 발발한 제4차 중동전과 석유 위기 사태에 대한 대응을 놓고도 미·불 양국 간의 마찰이 나타나 핵무기 협력은 거의 정지 상태로 들어갔다.
다음 해 4월 퐁피두 대통령이 암으로 타계한 후 양국 간 핵기술 협력이 재개됐다. 역대 최연소 대통령에 당선된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 대통령이 드골 식 독자 노선에 집착하기보다 실용적으로 미국과의 외교안보 협력을 증진시키려 했기 때문이다. 전직 재무장관 출신인 지스카르 데스탱은 핵무기 고도화에 필요한 비용을 절감하면서 신속히 핵무기 성능을 발전시키는 노선을 택했다.
미국에서는 닉슨이 워터게이트 스캔들로 1974년 8월 사임한 후 제럴드 포드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그러나 키신저 보좌관은 국무장관까지 겸임하며 영향력을 강화했고, 슐레진저도 1975년 11월까지 국방장관으로 재임했다.
지스카르 데스탱은 1974년 12월 포드 대통령과 가진 정상회담에서 구체적으로 미국의 핵기술 지원 분야를 적시하며 미국의 지원을 요청했다. 지스카르 데스탱 대통령은 무엇보다 프랑스의 다탄두 M4 핵미사일 개발에 필요한 설계 지원, 탄두 소형화 및 다탄두화 기술, 지하 핵실험 기술, 미국의 고성능 IBM 컴퓨터 수출 통제 해제 등 여러 분야에서 본격적인 지원을 요청했다. 미국은 탄두 디자인을 넘겨 주지는 않았지만, 지속적으로 프랑스 당국과 기술진들의 관련 문의와 요청에 성의 있게 대응했다.
지스카르 데스탱은 1981년 선거에 패배해 단임(單任)으로 물러났다. 하지만 미국에서 지미 카터,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집권하는 동안 두 나라 사이의 핵무기 기술 협력은 계속됐다.
“프랑스 핵심이익 침해 땐 準전략핵 대응”
프랑스에서는 1981년 5월 사회당의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이 집권한 이후 핵무기에 대한 정책 변화의 가능성이 예상되기도 했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 중 레지스탕스 운동에 참여했던 미테랑도 14년 동안의 집권 기간 중 핵무력 고도화를 위한 대미 협력을 지속했다. 그러는 동안 프랑스 측에서도 레이저 기술 등의 부문에서는 오히려 기술을 이전하며 미국과 호혜적인 협력 관계를 유지했다고 프랑스 측 연구자들은 강조하고 있다.
이 같은 기술 이전에도 불구하고 프랑스는 미국의 희망과 달리 나토의 핵기획 그룹에 참여를 거부했다. 드골 대통령 당시부터 추진해 온 핵무기 운용상의 주권적 독립성을 절대적 원칙으로 고수한 것이다. 그러나 핵무기 이외의 분야에서 나토와의 협력은 1974년 지스카르 정부 출범 이후 계속 발전시켜 왔다.
특히 냉전 종식 이후 1990년대에는 나토와의 군사 협력을 확대했다. 2009년 4월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 집권기에는 마침내 나토의 통합사령부에 복귀했다. 냉전 종식 이후 나토의 역할이 구(舊) 유고슬라비아 내전(內戰) 사태와 폴란드, 발트 3국 등 동유럽 국가들의 가입으로 급속히 확장됐기 때문이었다. 여기에다 9·11 테러 이후 아프가니스탄 전쟁 참전 등으로 유럽 이외 지역까지 나토의 역할이 확대되자 ‘통합사령부에 복귀해 나토 안에서 유럽 국가들 사이의 독자적 군사 역할(European Pillar of NATO)을 프랑스가 주도한다’는 노선을 채택하게 된 것이다.
핵무기 사용의 교리 면에서 프랑스는 단거리 전술핵 폐기를 제외하곤 냉전기에 개발한 교리를 거의 유지하고 있다. 적대국(러시아)이 나토 동맹국에 프랑스의 ‘핵심적 국익(vital interest)’을 침해하는 군사 공격을 가해 올 경우, ‘최후의 경고’로 준전략(sub-strategic) 핵무기로 군사 목표물들을 먼저 공격한다는 전략이다. 대도시나 군 사령부 등에 대한 괴멸적 전략핵 공격이 임박했음을 경고함으로써 적국의 군사행동을 저지한다는 핵 사용 교리다.
바이든 행정부 당시 한미 핵협의 그룹(NCG)의 미국 측 대표였던 비핀 나랑 박사는 프랑스의 이 같은 선제 핵사용 전략을 ‘비대칭 확전 방식(asymmetric escalation)’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프랑스 측은 최소한의 핵전력만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방어적이며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강조해 왔다. 6월 24일 파리의 프랑스 국제문제연구소(IFRI)에서 만난 엘로이즈 파예 핵억지·확산연구팀장은 “프랑스는 국토가 광활하지 않아 적국의 군사 공격이 프랑스 영토에 도달할 때까지 기다릴 여유가 없다”며 ‘최후의 경고’ 방식을 채택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했다.
핵우산 제공 협의 시작
최근 관심을 모으는 나토 회원국들에 대한 프랑스 핵우산 제공도 준전략 핵무기를 사용토록 하는 ‘핵심이익’을 어떻게 규정하느냐와 연관돼 있다. 프랑스는 이미 사르코지 정부 시절이던 2008년부터 나토 회원국들에 대한 재래식 공격도 프랑스의 ‘핵심이익’을 침해하는 사태로 간주한다고 시사(示唆)해 왔다. 2020년부터는 마크롱 대통령이 “프랑스의 핵심이익은 유럽 차원의 영역(European dimension)을 포함하고 있다”고 밝혀 왔다. 그러다가 올 연초부터 미국 핵우산에 대한 신뢰가 흔들리자 3월 6일 마크롱 대통령이 명확하게 다른 나토 회원국들에 대해 핵우산을 제공하겠다는 의사를 표시한 것이다.
프랑스가 자체 핵우산을 제공하게 될 것으로 추정되는 나라들은 폴란드, 독일, 발트 3국, 스웨덴 등 러시아에 가까이 위치한 나토 회원국들이다. 파예 박사는 “프랑스는 예컨대 동맹국인 폴란드 영토의 4분의 1을 러시아군이 점령하는 상황을 묵과하지 못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어느 나라가 준전략 핵무기의 사용을 촉발시키는 ‘핵심이익’에 포함되는지에 대해 프랑스는 의도적으로 애매한 입장을 취해 왔다. 그래야만 재래식 공격 등 러시아의 도발을 억지하는 효과가 높다고 판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프랑스와 독일 등 다른 나토 회원국들 사이에는 핵우산을 제공하기 위한 협의들이 시작됐는데, 앞으로 본격화될 것으로 보인다. 파예 박사는 “학자나 민간 연구원들이 주로 참여하는 ‘트랙 2’, 그리고 민관 전문가들이 함께 참여하는 ‘트랙 1.5’ 방식의 협의가 활발하게 진행 중”이라면서 “다른 나토 회원국들의 재래식 전력과 프랑스 핵무기를 함께 운용하는 방안뿐 아니라, 구체적으로 유사시 프랑스 전투기들의 영공 통과 여부와 방안 등에 대한 협의도 진행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핵탄두 290여 발, 잠수함 전략핵 48기 상시 운용
현재 프랑스 핵전력은 핵추진 잠수함에서 발사하는 전략 핵미사일과 전투기에서 발사하는 공중 발사 순항미사일(준전략 임무용)로 구성돼 있다. 냉전 기간 중에는 지상에서 발사하는 단거리 지대지 핵미사일인 플뤼통 미사일까지 배치해 핵 3축 체제(Triad)를 유지하면서 540발까지 핵탄두를 유지했다. 하지만 냉전 종식과 함께 독일이 통일되고 동유럽 국가들이 나토에 가입하면서 지상 발사 단거리 미사일들(500km 이하)은 군사적 의미를 상실해 1996년 폐기했다. 핵탄두 숫자도 최소 억지 정책에 따라 290여 발만 실전용으로 유지하고, 퇴역시킨 80여 발은 만일의 사태 등에 대비해 보관 중이다.
프랑스의 전략 핵무기는 4척의 르 트리옹팡급 전략 핵잠수함(SSBN) 체제로 구성돼 있다. 이들 전략 핵잠수함들 가운데 한 척은 항상 바닷속에서 항행하며 핵억지력의 기반을 유지하고 있다. 트리옹팡급 잠수함은 M-51 계열 잠수함 발사 미사일(SLBM) 16기를 발사관에 탑재한다. 바닷속에서 고체연료 추진체로 발사되는 M-51 미사일의 사거리는 약 6000~1만km 정도이고 미사일 1기당 6~10개의 소형화된 수소폭탄이 탑재돼 있다. 최신형 M-51 계열 핵미사일은 개발 당시부터 우주 발사체인 아리안 로켓과 전자장치, 유도 시스템, 고체연료 추진체 등에서 호환적으로 개발돼 왔다.(《Bulletin of Atomic Scientist》 2025 년 7월호)
M-51 미사일은 목표 상공에 접근한 후 소형 핵탄두들이 본(本) 미사일에서 분리되어 각각 별도의 목표를 공격토록 설계된 독립목표 재돌입(MIRV) 미사일이다. 1970년대 초부터 일부 미국의 기술 지원을 받은 무기 체계이지만 프랑스는 자체 능력으로 10년마다 새로운 버전의 미사일을 실전 배치해 왔다.
M-51 미사일을 탑재한 프랑스의 전략 핵잠수함은 적국으로부터 1차 핵공격이 있어도 해저에서 생존성을 유지하며 적국의 도시와 군 지휘 사령부 등을 향해 괴멸적 타격을 가할 수 있는 전략무기다. 프랑스는 현재의 트리옹팡급 핵잠수함들을 2035년부터 스텔스 기능이 앞선 차세대 핵잠수함(SNLE-3G)으로 대체할 계획인데, 작년 3월 셰르부르 항구에서 건조 작업을 시작했다.
핵무기 탑재 잠수함 전력 가운데 항상 한 척은 석 달 정도 바닷속에서 잠항(潛航)하며 작전임무(patrol)를 수행한다. 그동안 다른 한 척은 훈련·무장 등을 준비하는 작전 투입 전 상태를 유지한다. 세 번째 잠수함은 작전 후 귀환 중 상태에 있다. 마지막 한 척은 모항(母港)에서 수리나 정비를 받게 된다. 이 때문에 최소 핵억지력(minimum deterrence) 원칙을 채택한 프랑스는 정비 중인 1척을 제외한 잠수함 3척에 필요한 M-51 미사일 48기만 개발해 운용하고 있다.
전략 핵잠수함 기지는 대서양 연안 브리트니주의 일롱그 항구에 있다. 작전에 나선 트리옹팡급 잠수함은 핵추진 공격 잠수함(SSN)인 쉬프렌(바라쿠타)급 잠수함과 작전 해역에 따라 해상초계기, 대잠(對潛) 프리기트함, 대잠 헬리콥터 등의 호위를 받는다.
라팔 전투기에 극초음속 핵미사일 장착 계획
프랑스의 공중 발사 핵전력은 라팔 전투기에 탑재돼 발사되는 사정거리 500km의 공중 발사 순항미사일(ASMPA·마하 3)이다. 적국이 프랑스를 위협하는 재래식 공격을 중지하지 않을 때 ‘최후의 경고’용으로 발사하는 준전략 핵무기다.
현재까지 프랑스는 4.5세대 전폭기인 라팔 전폭기 2개 편대(40대)를 유지하고 있다. 지난 3월 마크롱 대통령은 2035년까지 신형 라팔 F-5 2개 편대를 추가로 완성해 뤼크세유 생소베르 공군기지에 배치하겠다고 발표했다. 라팔 F-5 전투기에는 ASNG4 극초음속 핵미사일이 장착된다. 러시아의 위협과 미국 핵우산의 신뢰도 저하에 대응하기 위해 앞으로 10년 안에 공중 발사 핵전력을 두 배 가량 증강시키기로 한 것이다.
이와 별도로 프랑스는 샤를 드골 핵추진 항공모함에 탑재된 10기의 라팔 전투기에도 유사시 ASMPA 미사일로 핵무장을 할 수 있도록 준비해 두고 있다. 핵미사일 탑재시 라팔 전투기의 항속거리는 약 1000km이고, 프랑스가 13기를 유지하고 있는 에어버스 A330 공중급유기에 의한 재급유로 항속거리 연장이 가능하다.
프랑스는 드골 대통령 퇴임 이후인 1974년부터 대기권 핵실험은 중단했다. 세계 여론의 빗발치는 비판도 있었지만, 이미 200차례가 넘는 핵실험을 통해 충분한 데이터를 확보했기 때문이다. 1996년부터는 포괄적 핵실험금지조약에 서명했고 그 이후 컴퓨터 시뮬레이션이나 레이저 시설로 탄두의 신뢰성을 검증하고 있다.
영-불, 핵조율위원회 출범
이 같은 핵무기 능력은 현재까지 프랑스 국방전략을 충족시켜 왔지만, 각각 5000발 이상 핵탄두를 보유하고 있는 러시아나 미국에 비하면 훨씬 적은 규모다. 국방 예산의 한계를 반영한 것이기도 하지만, 미국이 유럽에서 핵우산을 유지한다는 전제 아래 유지해 온 최소한의 핵억지력이다.
올 연초부터 트럼프 2기 행정부는 나토 회원국들에 대해 국방비를 늘리라는 압력을 강화해 왔지만, 아직 유럽에서 핵우산을 철수하겠다고 밝힌 적은 없다. 완전 철수는 미국의 안보도 해칠 수 있고, 유럽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 상실을 부르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프랑스는 영국과 핵무기 협력을 증진시켜 앞으로 미국 핵우산의 신뢰도가 떨어질 가능성에 대비하고 있다. 사실 프랑스와 영국 두 나라 정상은 이미 1995년 ‘체커스 선언(Checkers Declaration)’ 이후 “상호안보 면에서 (핵무기를 사용하면서 지켜야 할) 핵심이익을 공유하고 있다”는 입장을 밝혀 왔다. 이 같은 선언적 입장을, 지난 7월 10일 영불 정상회담에서 ‘랭카스터 하우스 2.0 협약’을 채택하면서 핵조율위원회를 출범시켜 구체적으로 발전시켜 나가게 된 것이다.
프랑스 전략연구재단의 브루노 테르트레 부소장은 영불 핵협력과 관련, 7월 17일 시사주간지 《르 포앵》에 실은 기고에서 “아직 완벽한 단계는 아니지만 유사시 공동의 핵우산을 나토 회원국에 제공하도록 거의 합의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평가했다. 최종 핵무기 사용 여부는 두 나라 모두 아직까지 주권적 사항으로 각자 독립적으로 결정한다고 못 박고 있다. 하지만 핵잠수함이 순찰하는 해저 작전 지역, 핵 탑재 전투기의 공동작전, 미사일 공격 목표의 중복을 피하기 위한 사전 조율 등 협력들이 구체화될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이제 그동안 나토 차원의 핵기획 그룹에 참여하지 않아 온 프랑스가 영국과 함께 다른 나토 회원국들에게 핵우산 제공을 협의하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다 지난 7월 17일 독일과 영국이 처음으로 포괄적 국방·안보 협정을 체결, 영-불-독 3국 간의 안보 협력이 강화되는 등 유럽 안보에 획기적 변화가 일고 있다.
한국, 일본 수준의 잠재적 핵능력 확보해야
프랑스의 독자적인 핵무기 개발은 1950년대와 60년대 중 진행된 것으로, 1968년 핵 비확산협정(NPT)이 체결되기 이전에 이뤄진 것이다. 때문에 NPT 회원국인 우리나라가 당면한 상황과는 큰 차이가 있다. 하지만 프랑스가 그런 선택을 하게 된 이유와 그 이후 미국의 대응 등은 현재 대한민국이 해결해야 할 과제를 돌아보게 만든다.
우리나라는 핵무기를 개발할지 여부와는 별도로 이미 일본이 확보한 수준의 평화적 원자력 기술을 확보해 가는 일이 시급하다. 국내 원전(原電) 연료를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데 필수적인 우라늄 농축 능력이나, 이미 저장 시설이 포화상태에 들어간 사용후 핵연료를 재처리해 보관할 수 있는 능력 확보를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상황이다.
지난 8월 25일 한미 정상회담 과정에서 앞으로 우라늄 농축과 사용후 핵연료의 재처리를 허용하는 방향으로 한미 원자력협정을 개정토록 협상해 가기로 합의가 이뤄졌다. 정상회담 직후 이재명 대통령은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연설에서 “NPT 체제를 준수하면서 한반도 비핵화(非核化) 실현을 위해 노력해 가겠다”고 밝혔다. 따라서 우리 정부와 산업계는 앞으로 경제적 목적을 위한 산업용 핵기술을 확보하는 데 매진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한미 정상회담 이후 북한은 미북 회담의 길은 열어 두면서도 핵무력 고도화를 계속하겠다는 입장을 바꾸지 않고 있다. 우리 정부는 최악의 경우에 대비해 현재 일본 수준의 잠재적인 핵능력 확보를 위한 노력은 ‘보험’ 차원에서도 미룰 수 없다.
콜비, ‘슐레진저 독트린’ 강조
필자는 작년 5월 《조선일보》가 개최한 아시안 리더십 회의 때 현재 미 국방부 정책 부장관을 맡고 있는 엘브리지 콜비를 두 차례 만나 중요한 조언을 들을 수 있었다. 그는 《월간조선》 작년 2월호에 게재된 필자의 기고 〈미국 내 한일 우호적 핵무장 허용론〉을 전날 자동번역기로 잘 읽었고 엑스(X)로도 공유했다면서 “슐레진저 독트린이 대단히 중요하다”며 관심을 가지라고 권유했다.
실제로 제1기 트럼프 행정부 당시 콜비가 입안을 주도했던 2018년 〈미 국방전략 문서(NDS)〉에도 제한적인 핵전쟁 옵션을 유지해야 한다는 슐레진저 식 건의가 포함돼 있다. 이미 2012년 발표한 논문에서도 콜비는 중국의 군사 위협과 북한의 핵능력 고도화 등에 대응하기 위해 미국이 핵무기를 정책 수단으로 활용해 가야 하는 상황이 시작되고 있다고 지적했었다. 그 연장선 상에서 콜비는 공직에서 떠나 있던 바이든 행정부 기간 동안 “한일 양국의 핵무장은 프랑스와 영국의 핵무장이 냉전 시절 대소련 핵억지력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됐던 것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시각을 보여 왔다.
프랑스의 핵무장 과정에서는 대통령이나 총리직을 맡은 지도자들이 좌우 정파를 가리지 않고 핵능력 확보를 지지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또 일단 프랑스가 자체 기술로 핵개발에 성공하자 프랑스를 우군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미국 측이 나서서 기술 지원을 해준 사실도 참고할 대목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휴전 등의 방식으로 일단 매듭지어지면 지정학적(地政學的) 경쟁의 파도가 동북아시아로 밀려올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희망적 사고나 노선에 묶여 현실을 외면하기보다, 정파를 뛰어넘어 전략 환경의 변화에 대비해 가는 것이 긴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