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지난 15일(현지시각) 알래스카에서 3년 만에 정상회담을 가진 가운데, 회담 내용을 담은 미 국무부 비공개 문건이 앵커리지 시내 한 호텔 공용 프린터에서 발견됐다.

16일 NPR 등에 따르면 4성급 호텔 ‘캡틴 쿡’에서 발견된 8쪽짜리 이 문건에는 두 정상 오찬 메뉴와 좌석 배치도, 트럼프 대통령이 푸틴 대통령에게 주려던 ‘미국 흰머리수리 책상 조각상’ 선물같은 보안상 극비 정보가 담겼다.

미국 알래스카에서 회동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왼쪽)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연합뉴스

가장 눈길을 끈 것은 열리지 못한 오찬 메뉴였다. 이날 두 정상은 회담 중간 업무 오찬을 가질 예정이었다. 그러나 회담이 길어지면서 오찬은 취소됐다. 성사되지 못한 이 식사는 이제 양국이 그리려 했던 외교 구상을 들여다보는 창이 됐다.

이날 상에 오를 예정이었던 메뉴는 간단한 세 코스로 짜였다. 이는 격식보다 실리를 중시하는 트럼프 대통령 특유 스타일을 보여준다. 전채로는 ‘샴페인 비네그레트를 곁들인 샐러드’, 디저트는 ‘크렘 브륄레’였다. 메인은 두 가지 요리를 한 접시에 담은 듀엣(duet)으로 구성했다. 하나는 ‘브랜디 페퍼콘 소스를 곁들인 필레 미뇽’, 다른 하나는 ‘핼리벗(가자미) 올림피아’였다.

필레 미뇽은 소 한 마리에서 극소량만 나오는 최고급 안심 스테이크다. 전통적으로 부와 권위를 상징해 백악관 뿐 아니라 여러 국가에서 국빈 만찬 단골 메뉴로 쓰인다. 회담 주도권을 쥔 미국의 힘과 국격을 과시하는 고전적 선택으로 풀이된다. 반면 핼리벗 올림피아는 가자미에 마요네즈와 크래커 부스러기를 뿌려 구운 소박한 가정식이다. 1950년대 후반부터 알래스카 지역 요리책에 등장하며 알려졌다. 이 음식은 이 지역 주민들에게는 아늑하고 편안한 향수를 자극하는 음식이다. 알래스카 현지 음식 잡지 편집장 제러미 파타키는 뉴욕타임스(NYT)에 “최고 수준 국빈 만찬 메뉴로는 다소 놀라운 선택”이라고 했다.

알래스카 앵커리지의 한 호텔 프린터에서 찾은 트럼프-푸틴 알래스카 오찬 관련 문서. /NPR

최고급 스테이크와 평범한 가정식 생선 요리를 한 접시에 같이 내면 선명한 대비를 강조할 수 있다. 전통적 권위(필레 미뇽)를 과시하면서도, 소박하고 친근한 제스처(핼리벗 올림피아)를 통해 상대방을 무장 해제시키고 ‘통 큰 거래’를 시도하려는 전략적 포석이라는 평가다.

특히 굳이 가자미를 고른 점에 외교 전문가들은 주목했다. 1867년 미국은 러시아로부터 720만달러 헐값에 알래스카 땅을 사들였다. 이 곳에서 협상은 러시아인에게는 상실감을 자극할 수 있다. 하지만 역으로 미국과 러시아가 공유하는 베링해협에서 널리 잡히는 가자미를 상에 올려 ‘분쟁’이 아닌 ‘화합’ 메시지를 던지려 했다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는다. 강대국 상징(필레 미뇽)과 지역적 화합(광어)을 한 접시에 담아 ‘힘을 바탕으로 한 평화 공존’ 구상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려 했다는 추론이다. 파타키 편집장은 “알래스카와 러시아 사이 바다에서 뭐가 잡히는지 그려보면 당연히 가자미가 있다”고 했다.

베링해협 인근에서 가자미 낚시를 위해 배를 준비하는 어민들. /연합뉴스

한편 이날 회담 후 두 정상은 ‘큰 진전’이 있었다고 밝혔지만 구체적인 휴전 합의에는 이르지 못했다. 푸틴 대통령은 “이해에 도달했다”고 말한 반면, 트럼프 대통령은 “합의가 이뤄지기 전까지는 합의가 없는 것”이라며 온도 차를 보였다. AP 등에 따르면 푸틴 대통령은 러시아 공격을 멈추는 대가로 우크라이나가 도네츠크주 전체를 포기할 것을 요구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18일 워싱턴을 방문할 예정이다. 결국 ‘평화의 만찬’은 열리지 못했고, 식탁에 오르려던 음식에 담긴 외교적 구상도 미완으로 남았다.